진보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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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1월 10일 조봉암(曺奉岩)을 비롯한 박기출, 김달호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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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56년 11월 10일 조봉암(曺奉岩)을 비롯한 박기출, 김달호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정당.
개설

진보당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즉 민주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였으나 15개월만에 ‘진보당 사건’으로 정부에 의하여 등록이 취소되어 1958년 2월 25일 소멸되었다.

내용

일제하 조선공산당 당원으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조선공산당 창당보고를 하기도 했던 조봉암은 해방 직후인 1946년 2월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라는 서신에서 사실상 조선공산당과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적인 정치노선을 모색하였다. 그는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가 구성되고 10월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되자 이를 지지하였다.

1947년 2월 1일 조봉암은 과거 화요파 동지였던 김찬, 배성룡 등과 조선민족독립전선결성준비임시위원회를 구성하여 “좌우익 정객들의 반민족적 편향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완수하기 위하여 혁명적 애국자를 중심으로 민족의 통일전선을 결성코자”하였다. 조봉암은 1948년 5·10선거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되고 이승만 정권 때 초대 농림부장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이 한참인 1951년 10월 조봉암은 일제 때 만들어져 해방 이후에도 존속하였던 농회조직을 바탕으로 한국농민회의를 창립하고 의장에 선출된다. 그는 이외에도 그동안 접촉해온 중도파나 혁신계, 족청계와 노동조합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자유사회당’이란 비밀서클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1951년 12월 이영근을 비롯한 50여 명을 연행하는 ‘대남간첩단사건’을 발표하여 조봉암의 신당조직 중심부에 대한 탄압을 가하였다.

조봉암은 1952년 8월 5일 2대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나는 계급독재사상을 배격한다. 공산당 독재도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강고히 반대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려한다.”는 정강을 내걸고 11.3%의 득표율을 얻었다. 그는 선거에서 패배하였지만 이승만에 대항한 정치인으로 부각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2년 후인 1955년 9월 1일 조봉암, 서상일, 장건상, 정화암, 최익환, 윤길중 등 40여 명의 진보적 민족주의자와 혁신계 인사들이 새로운 혁신 정당을 모색하기 위한 간담회인 ‘광릉회합’을 열어 진보정당을 만들기 위한 합의를 하였다. 1955년 10월 24일 진보당 결성 제1차 추진준비위원회가 개최되고, 그해 12월 22일 조봉암, 서상일, 박기출, 이동화, 김성숙(金成璹), 박용희, 신숙, 신백우, 양운산, 장지필, 정구삼, 정인태 등 12명의 발기인 명의로 “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를 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관료적 특권정치, 자본가적 특권경제를 쇄신하여 진정한 민주책임정치와 대중 본위의 균형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기약하고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서 선 신당을 발기하고자 한다.”는 ‘진보당 발기 취지문’과 “1.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로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여 책임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 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3. 민주우방과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통일의 실현 4. 교육체제를 혁신하여 국가보장제를 수립”한다는 ‘강령초안’이 발표되었다.

1956년 5·15정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신익희 대통령 후보가 급서하면서 자연스럽게 야당의 대통령후보는 조봉암으로 단일화되었다. 조봉암은 전체 유효투표자 수의 30%인 216만표를 얻는 성공을 거둔 뒤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11월 10일 정식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였다. “진보당이 걸어갈 길은 뚜렷합니다. 공산독재도 자본주의 독재도 다 같이 거부하고 인류의 새 이상인 진보주의의 진리를 파악하고 만인이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복지사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라는 조봉암의 말처럼 진보당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과 노선과는 다른 ‘제3의 길’을 표명하였다. 진보당은 1956년 12월 9일 경남도당 결성대회를 시작으로 1957년 4월 15일 서울시당 결당대회, 1957년 7월 18일 전남도당 결성대회, 1957년 10월 전북도당 결성대회를 여는 등 지방당 조직을 확대하여 전국적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1958년 1월 13일 4대 총선을 5개월 앞두고 ‘진보당사건’이 터지고 조봉암을 비롯한 핵심 간부들이 모두 구속되었다. 진보당은 1958년 5월에 실시될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최소한의 독자적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20석 이상의 의석 확보를 목표로 선거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목표달성은 현실성이 있었다. 그런데 1958년 1월 10일 서울시 경찰국은 민주정부를 변란할 목적하에 진보당을 창당 조직하고 평화통일을 선전하는 등 북한의 무력재침의 선전, 평화통일 공작에 호응, 친소 용공정책으로 적과 합세하여 정부전복을 기도하였다는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검거하였다. ‘진보당사건’의 발생으로 진보당 중앙당 사무실의 수색, 당원명부 등 각종 서류 압수 등 진보당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 착수로 당 활동은 마비되었고, 결국 공보실은 2월 25일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였다. 진보당은 서울고등법원에 진보당 등록취소의 행정처분취소신청을 내기도 하였으나, 대법원의 최종 판결에서 기각되었다.

참고문헌

『조봉암과 1950년대』상·하(서중석, 역사비평사, 1999)
『조봉암 연구』(박태균, 창작과비평사, 1995)
『조봉암과 진보당』(정태영, 한길사, 1991)
『대한민국정당사』(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68)
「진보당 조봉암 사건」(『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7)
집필자
전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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