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벽화는 무덤 안의 천장이나 벽면에 그려 놓은 그림이다. 현세의 부귀영화가 내세에도 계속될 것으로 믿는 내세관이 반영되어 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고분벽화는 고구려에서 가장 꽃피웠으며 이후 조선 초기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고분벽화는 제작된 시대의 사회문화상을 반영하고 있기에 사료가 드문 고대 사회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 자료가 되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 현세의 부귀영화와 권세가 그대로 이어지기를 소망하는 계세사상(繼世思想)에 의거하여 크고 화려한 무덤이 축조되었다. 지배자들은 현세에서 누리던 신분과 지위를 내세에서도 누리고자 하였으며, 처첩, 시종, 관리, 무사, 노비 등을 무덤에 함께 묻는 순장(殉葬) 제도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무덤 내에는 실물을 대신하여 모형(模型)이 묻히거나, 더 나아가 생전의 영광을 기리고, 누리고 싶은 주1의 삶을 형상화한 그림이 그려지게 되었다.
고분에는 묘주의 현실 생활을 반영한 벽화가 그려졌다. 고대 사회의 풍속 · 신앙 · 종교 · 사상 등을 생생하게 담아낸 벽화는 사료가 거의 전하지 않는 고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사 자료가 되었다. 미술사적 측면에서 고분벽화는 고대 회화의 제작 과정, 표현 기법, 예술적 수준, 안료의 사용 방식 등 여러 가지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동시에 주변국과의 관계, 다른 문화를 어떻게 수용하고 소화했는지 등 교류 관계를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준다.
동아시아의 고분벽화는 중국 전국시대에 제작된 시신을 안치한 관의 장식, 진시황릉(秦始皇陵)의 주2 천장의 천문도 등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다. 한대에는 중원 지역을 중심으로 고분벽화가 본격적으로 조성되었으며, 벽화를 포함한 장의 문화는 후한과 위진시대를 통과하며 변경 지역인 요령성 등으로 확산되었다. 고분벽화의 문화는 한나라가 설치한 2~3세기 경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을 매개로 한반도에 파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장례 미술을 수용한 우리나라에서는 중국과 공통점을 지니면서 동시에 특유의 주제와 표현 양식을 지닌 고분벽화를 형성하여 갔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시기의 고분벽화는 2세기 말경에 만들어진 평양의 낙랑(樂浪) 채협총(彩篋塚) 벽화이다. 채협총은 한나라 낙랑군 관리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으로서 전실 서벽(西壁)에서 사냥 그림의 일부로 보이는 기마 인물 2인과 도보 인물 1인의 그림이 발견되었다. 채협총 벽화는 한대에 무덤을 주3이나 주4, 혹은 벽화로 장식하고 관(棺) 표면에 각종 그림을 그리며 죽은 이를 주5로 덮는 풍습이 크게 성행했던 것과 맥이 닿는 유적이다. 채협총의 벽화는 중국 한대의 무덤 장식 습속이 한반도에 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달리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의 고분벽화는 한국 고대 사회의 주인공들이 직접 남긴 유적이다. 평양 지역에서 확인되는 중국 한대의 문화적 영향과 중국의 북방 지역을 통해서 형성된 주6계의 문화적 요소가 혼합되어 나타나며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삼국시대의 벽화 고분 중 고구려의 것이 100여 기로 가장 많다. 고구려는 동양에서 가장 풍부하고 다양한 고분벽화를 남겼다. 고구려의 고분은 토총(土塚)[石室封土墳]과 피라미드 모양의 석총(石塚) 두 가지가 있으며 이 중 석총에서는 벽화가 발견되지 않는다. 벽화 고분은 고구려의 수도가 있었던 중국 지안[集安]과 평양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고구려의 벽화 고분은 대략 3세기 말부터 7세기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시대의 변천에 따라 고분의 구조, 벽화의 내용, 화풍, 종교 등에서 다양한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구조면에서는 다실(多室), 이실(二室), 단실(單室)의 순서로 점차 단순화되었다. 벽화의 내용은 묘주의 초상화, 행렬도, 풍속화 중심에서 사신도(四神圖)로 전환되었다. 벽화의 내용 변화에는 앞 시대에 우세하였던 불교의 영향이 감소하고 도교가 득세하였던 현상이 반영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제작 기법 · 벽화 주제 등의 전개 과정을 반영하여 크게 초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진다. 초기의 대표적인 예로는 평양 · 안악 지역에 위치한 안악 3호분(安岳3號墳)과 덕흥리 고분(德興里古墳)이 있다. 두 고분은 모두 여러 개의 방을 가진 다실묘와 이실묘로서 벽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묘주의 초상화이다. 고구려의 벽화 고분 대부분은 연대를 알 수 있는 근거가 매우 부족하지만, 두 고분은 예외적으로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안악 3호분은 전실(前室)과 현실(玄室), 전실 좌우의 측실(側室), 회랑(回廊) 등으로 이루어진 다실묘 구조이다. 벽화의 내용과 형식은 중국 후한대(後漢代)의 벽화 고분과 연관이 깊다. 안악 3호분의 동쪽 측실에는 주방, 창고, 축사(畜舍) 등 다양한 풍속 장면이, 서쪽 측실에는 묘주(墓主) 부부의 초상이, 그리고 회랑에는 장대한 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천정은 모서리를 모줄임한 주7 형식으로서 고구려 고분 특유의 형식을 취하였다. 현실 천정에는 만개한 연꽃 문양이 그려져 불교의 영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묘주 부부의 초상이 그려진 서쪽 측실 앞에는 문지기 역할의 주8 상과 함께 “ 영화(永和) 13년”이라는 주9가 적혀 있어 축조 연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해서는 고구려 미천왕(美川王) 혹은 고국원왕(故國原王)의 무덤이라는 주장과, 귀화한 중국인 동수(冬壽)의 묘라는 두 가지 해석이 상존한다. 묘주는 화려한 휘장이 덮인 좌탑(坐榻) 위에 붉은 포를 입고 정면을 향하여 앉았다. 좌우에는 여러 명의 시종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서쪽 측실의 남쪽 벽면에는 측면으로 앉아 묘주를 바라보는 부인상이 위치한다. 부부 초상의 묘사 기법은 묘주와 유사하다. 묘주 부부의 모습에는 중국 후한대부터 위진시대까지 유행하였던 인물화 양식이 반영되었다. 회랑으로 이어지는 약 10m의 벽에 250여 명이 그려진 대규모 행렬도는 매우 높은 수준의 묘사력을 보이며 주인공의 권세와 영화를 반영하고 있다.
408년에 축조된 덕흥리 벽화 고분은 안악 3호분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고분이다. 덕흥리 고분은 내부에 적힌 묵서를 통해서 영락(永樂) 18년(408)에 제작되었고, 유주자사(幽州刺史)를 지낸 진(鎭)이라는 인물의 묘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전실과 현실의 2실로 구성되었으며 전실과 현실에 모두 묘주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전실에는 유주13군 태수배례도(幽州13郡太守拜禮圖), 조례도 등이 그려져 있다. 이 평양 지역 고분벽화의 인물들은 통이 넓은 중국계 복장을 한 모습으로 묘사되었으며 한대 고분벽화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중기는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에 걸치는 시기에 제작된 고분벽화이다. 중기의 벽화에서는 묘주의 초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감소하고 생활 풍속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이 시기의 고분은 주로 지안[集安] 지역에 위치하며 대표적인 벽화 고분은 각저총(角抵塚)과 무용총(舞踊塚)이다. 두 고분은 나란히 위치하며 구조적으로도 매우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무용총과 각저총은 전실의 크기가 대폭 줄어든 이실묘의 구조에 무덤 내부를 목조 건축물처럼 꾸몄다. 각저총 현실 북벽에는 주인공 부부의 초상화가 위치하며, 동벽에는 고분의 이름이 된 씨름 장면이 그려져 있다. 무용총의 현실 북벽에는 묘주가 스님들을 맞이하여 설법을 듣는 접객도(接客圖)가, 동벽에는 무용도가, 서벽에는 수렵도가 그려져 있다. 무용총의 벽화는 인물이 능숙하게 표현된 데 비하여 산과 나무는 상징적으로 단순하게 그려져 있어 산수 표현이 초보적인 단계임을 보여 준다. 통구에 축조된 장천(長川) 1호분의 벽화는 어느 고분보다도 강렬한 불교적 색채를 드러낸다. 장천 1호분의 전실 벽면에는 무용 장면과 수렵 장면이 등장하여 무용총과 유사성을 볼 수 있다. 전실과 현실을 연결하는 통로에는 사찰의 예불도(禮佛圖)가 그려져 있다. 광배를 배경으로 대좌에 앉은 부처의 모습은 5세기 고구려 불상과 상통하는 양식이다. 부처에게 절하는 묘주의 모습, 연화좌 위의 보살들, 연화화생(蓮花化生) 장면, 다양한 연꽃 등 장천 1호분의 벽화에서는 당시 고구려 사회에서 불교가 지닌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후기는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전반에 걸치는 시기에 축조된 고분의 벽화에 해당한다. 후기의 벽화 고분은 입 구(口)자 형태의 단실묘 구조로서, 벽화는 백회(白灰)를 사용하였던 이전 시대와 달리 석벽 위에 직접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후기에는 벽화의 기법과 수준이 현저하게 발전하였으며 가장 세련된 양상을 보이는 시기이다. 벽화의 내용을 보면, 이전 시대에 유행한 인물 풍속화가 완전히 사라지고 사방 벽에는 대형 사신도가 그려졌다. 사신은 사방을 나누어 동벽에는 청룡, 서벽에 백호, 북벽에 현무, 남벽에 주작을 배치하였다. 이 시기 고분벽화의 사신은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유일한 표현 요소로서 단순히 하늘 별자리를 형상화한 방위신 정도가 아닌 죽은 이의 세계를 지켜주는 우주적 수호신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고구려 사회에 도교 사상이 성행하였던 상황을 반영한다.
평양 · 안악 지역의 후기 고분벽화로 대표적인 것은 진파리 1호분(眞坡里1號墳), 내리 1호분(內里1號墳), 강서대묘(江西大墓), 강서중묘(江西中墓)를 들 수 있다. 진파리 1호분의 현실에는 나뭇잎 형상의 팔메트 문양과 빠르게 휘날리는 비운문(飛雲紋)을 배경으로 사신이 벽면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진파리 1호분의 표현은 이전 시대의 고식적인 산수 표현에서 한결 진전된 표현을 보이고 있다. 사신의 묘사에 보이는 생명력과 기운이 넘치는 형태는 중국 남조의 회화 양식을 토대로 한층 자연스럽게 재창조된 것이다. 북벽의 현무 주위에는 바람결에 춤추듯 하늘거리는 수목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고개지(顧愷之, 334~406 주10 전칭의 「낙신부도권(洛神賦圖卷)」에 나타난 수목 표현과 상통하며 남조의 산수화 양식을 반영한 것이다.
강서대묘는 단실묘로서 7세기 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벽면은 잘 다듬은 화강석면으로서 석면 위에 직접 벽화를 그리고 있다. 각 벽에는 사신을 그리고 천정에는 중앙을 상징하는 황룡을 배치하여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드러냈다. 강서대묘의 사신도는 강렬한 활력과 신비로운 생동감을 자아내며 동아시아 사신도 예술의 극치를 보이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집안 지역의 벽화 고분으로는 통구사신총(通溝四神塚), 오회분 5호묘(五盔墳5號墓), 오회분 4호묘(五盔墳4號墓)를 꼽을 수 있다. 이 무덤들은 모두 구릉 기슭에 남향(南向)으로 축조되었으며 뒤로는 산을 지고 앞으로는 들을 내다보는 곳에 위치하였다. 평양 지역 고분벽화에서 사신은 6세기 남조 미술의 영향을 짙게 받고 있는 진파리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배경 표현을 가능한 한 배제한 상태에서 묘사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에 반해 지안[集安] 지역 고분벽화에서는 복잡하고 화려한 배경을 바탕으로 사신이 표현되는 경향을 보여 준다. 오회분 4호묘 및 5호묘는 유사한 구조와 벽화를 지닌 고분이다. 이곳에는 화강암의 석벽 위에 오방색을 사용한 현란할 정도로 화려하고 눈부신 벽화가 그려져 있다. 현실의 모퉁이에는 두 팔로 천정을 받치고 있는 괴수상이 위치한다. 현실의 벽면은 사방 연속의 보주형 당초문으로 장식되었으며 이를 배경으로 사신을 그렸다. 당초문 안에는 다양한 형태의 신선상이 그려져 있다. 경전을 읽고, 단약을 만들고, 팔괘를 그리는 신선의 형상은 고구려에서 도교가 성행하였던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벽면에는 사신이 중심을 이루는 것과 대조적으로 천정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일신(日神)과 월신(月神), 불을 다루는 수신(燧神), 쇠를 다루는 야철신(冶鐵神), 제륜신(製輪神), 농신(農神), 무용신, 악기를 다루는 신들, 용이나 학을 탄 신 등 다양한 상징성을 지닌 신들이 등장하여 천상의 세계를 보여 준다.
고구려의 후기 벽화는 고구려의 전통과 중국 남북조의 문화를 수용하여 새로운 고분벽화의 내용과 형식을 성립시켰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구려의 멸망 후에는 더 이상 제작되지 못하였지만 이주민을 통해 일본 등으로 파급되었다. 중국과 북한에 위치한 고구려 벽화 고분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각각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 및 ‘고구려 고분군[Complex of Koguryo Tombs]’으로 등재되었다.
백제의 벽화 고분으로는 공주 송산리 6호분(松山里6號墳) 및 부여 능산리 벽화 고분(陵山里 壁畫古墳)이 있다. 송산리 6호분은 현재의 공주에 도읍을 정하였던 웅진 시기(475538)에, 능산리 고분은 부여로 천도한 이후인 사비 시기(538660)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웅진 · 사비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기의 전축분(塼築墳)과 수많은 석실묘(石室墓) 가운데 현재까지 발견된 벽화 고분은 2기에 불과하다. 이로 보아 백제에서는 무덤 안에 그림을 그리는 문화가 성행하지 않았으며 두 고분은 예외적인 경우였음을 알 수 있다.
6세기 초에 축조된 송산리 6호분은 무령왕릉(武寧王陵) 인근에 위치하며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조성된 고분으로 보인다. 중국 남조의 묘제를 따라 벽돌로 제작된 전축분으로서 5.7m 길이의 연도 및 현실을 지닌 단실묘이다. 벽돌로 쌓은 벽면의 일부를 두껍게 회로 칠하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다. 송산리 6호분 벽화의 내용은 각 벽에 사신을 하나씩 그린 사신도이며 현재는 손상이 심하여 흔적만 남아 있다. 벽화의 내용을 사신만으로 구성한 점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신의 형태와 자세에서는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중국 남조 양식이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능산리 1호분으로 지칭되는 동하총(東下塚)은 능산리 고분군 중 유일하게 벽화가 발견된 경우이다. 능산리 1호분은 연도와 현실로 구성된 단실묘 구조로서 천정은 고구려와 달리 수평식으로 축조되었다. 현실 벽면에는 사신도를, 천장에는 비운(飛雲) 연화문(蓮花紋)을 그렸다. 강하게 휘날리는 구름과 잎이 넓고 끝이 부드러운 연화문은 고구려 및 남조 회화와 관련된 기법을 보인다.
신라의 고분벽화로는 순흥에서 발견된 영주 순흥 벽화 고분 (榮州 順興 壁畵 古墳)과 순흥 어숙묘 (順興 於宿墓)의 벽화가 있다. 영주 순흥 벽화 고분은 순흥 읍내리 벽화 고분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횡혈식 석실분으로서 5세기6세기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실의 문과 네 벽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현실로 들어가는 연도 좌우측에 역사 모습의 수호신상이 그려져 있다. 동쪽 연도의 수호상은 상체를 벗은 근육질의 인물상이, 서측 연도에는 두 손으로 뱀을 잡고 있는 인물이 확인된다. 현실 남벽에는 인물상의 일부분이 남아 있으며 “기미중묘상인명(己未中墓像人名)”이라는 묵서가 함께 적혀 있다. ‘기미’라는 간지를 근거로 읍내리 고분은 479년, 혹은 539년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동쪽 벽면에서는 삼족오(三足烏)가, 서벽에서는 여인상의 상체가 보이며 가옥과 버드나무 등이 확인된다. 순흥 읍내리 고분벽화는 고구려의 고분벽화와는 표현과 제재에서 다른 부분을 보여주며 이에 관한 연구 필요성이 지적된 바있다.
읍내리 벽화 고분에서 서쪽으로 660m 떨어진 태장리에는 어숙술간 벽화 고분으로 알려진 순흥 어숙묘가 위치한다. 현실 돌문 안쪽에 '을묘년어숙지술간(乙卯年於宿知述干)'이라는 명문(銘文)이 적혀 있으며 이에 근거하여 축조 시기를 595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숙술간묘는 읍내리 고분과 비슷한 횡혈식 봉토석실분 구조이다. 현실의 벽에 회칠을 하고 그림을 그렸으나 그림의 대부분이 박락되어 확인이 어려운 상황으로 돌문에 그려진 23인의 인물상과 연도 천장의 연꽃 문양이 확인될 뿐이다. 천정의 연꽃 문양은 진파리 1·4호분의 문양과 유사하며 신라의 불국토 사상을 구현하고 있다.
가야의 벽화 고분으로는 고령 고아동 벽화 고분(高靈 古衛洞 壁畵 古墳)이 유일하다. 고아동 벽화 고분은 남향의 석실분이면서도 구조는 백제의 공주 시기 벽돌무덤의 것을 따르고 있다. 6세기 중엽 백제의 후원을 받으며 신라의 압박에 대항하였던 대가야(大伽倻)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벽화는 회칠한 벽면 위에 그려졌으며 연도 천정과 현실 상부에 연꽃무늬와 구름무늬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고분의 구조뿐 아니라 벽화의 내용과 표현은 백제의 영향일 가능성이 높다.
삼국시대 이후 고분 내부를 벽화로 장식하는 풍습은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약화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고분 중 벽화가 그려진 사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발해의 벽화 고분으로는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시 용두산(龍頭山)에서 발견된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 삼릉둔 2호묘, 금성리 고분벽화 등이 알려져 있다.
정효공주는 발해 문왕(文王)의 넷째 딸로 792년에 사망하였다. 정효공주묘는 부부 합장묘로서 지상부는 전탑 형식으로 축조하고 지하를 고분으로 사용하였다. 묘의 외부에는 계단형의 묘도와 묘문이 있으며 내부는 연도와 현실로 구성되었다. 연도와 현실의 벽면은 벽돌로, 천정은 판석으로 축조하였으며 그 위에 백회를 바르고 먹으로 윤곽을 잡고 채색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연도 동 · 서벽에는 무사형의 수문장이 서로 마주보는 위치에 그려졌다. 정효공주묘의 벽화는 다채로운 인물상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열되어 있는 정적인 구성을 보이는 점이 특징이다. 현실의 동 · 서 · 북벽은 시위무사 · 악사(樂士) · 시종 등 10여명에 이르는 실물 크기의 인물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채색은 다홍색 · 적갈색 등 붉은색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푸른색 · 검은색, 흰색 등이 더해졌다. 색채는 선명하고 인물의 모습이 뚜렷하며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다. 정효공주묘의 벽화는 8세기 말경 발해의 생활상과 문화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벽화 고분은 여말선초의 박익묘(朴翊墓)를 포함하여 19기로서 비교적 많은 수가 남아 있다. 대표적인 벽화 고분으로는 개성에 위치한 태조 왕건(王建)의 현릉(顯陵), 개풍의 수락암동 주11, 장단의 법당방 석실분(法堂坊 石室墳), 파주의 서곡리 고려 벽화묘(瑞谷里 高麗 壁畫墓), 거창의 둔마리 벽화 고분(屯馬里 壁畫古墳) 등이 있다.
왕건의 현릉은 연도가 없는 단실묘로서 벽화의 반 이상이 박락된 상태이며 북벽과 남벽의 벽화는 알아볼 수 없다. 동벽에는 매화, 대나무, 청룡, 서벽에는 소나무, 매화, 백호의 그림이 남아 있다. 송죽매(松竹梅)는 주12의 제재로서 유가적인 사상을 대변하는 소재이다. 개성시 고남리의 수락암동 1호분은 1200년을 전후하여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직사각형의 현실에 석회를 바르고 벽화를 그렸다. 벽면에는 청룡, 백호 등의 사신도를 그리고 위쪽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배치하였다. 십이지신상은 문관조복의 차림새에 홀을 들고 해당 동물 형상의 관모를 착용하였다. 신상을 묘사한 능숙한 붓질과 자연스러운 표현은 고려의 고분벽화 중 가장 세련된 수준을 보여준다.
1971년 세상에 알려진 둔마리 고분벽화는 약 131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둔마리 고분은 길이 2.46m, 높이 0.92m, 너비 0.98m의 쌍곽묘로서, 동서 두 개의 석실로 구성되었다. 동실 벽면에는 석회로 바탕을 칠한 후 그 위에 40cm 내외의 크기로 피리를 불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춤추는 주악무도천녀(奏樂舞蹈天女)를 그려 넣었다. 천녀들은 둥근 얼굴에 화관(花冠)을 쓴 모습으로 어색하게 표현된 부분도 있으나 고졸한 표현에서 생명력이 느껴진다.
고려 말기의 고분벽화로는 파주 서곡리의 권준묘(權準墓), 1374년에 조성된 공민왕릉(恭愍王陵) 등을 들 수 있다. 고려의 권문세족인 권준(12811352)의 묘는 봉토석곽분(封土石槨墳)이다. 화강암 재질의 판석 벽면에 십이지신상을 그리고, 천정에는 천문도를 그렸다. 이처럼 십이지신상이 단독으로 그려지는 방식은 공민왕의 현릉(玄陵)에서도 발견된다. 개성에 위치한 공민왕 현릉의 벽화는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현릉의 십이지신상은 백관의 모습을 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구름이 그려졌다. 신상의 자세는 도식화된 정면관에 다양한 채색과 투박한 주13의 필선을 구사하였으며 높은 수준의 회화는 아니다.
박익(朴翊, 13321398)은 여말선초의 문사로서 그의 사후 22년 뒤인 1420년에 무덤이 축조되었다. 박익묘는 밀양 청도면에 위치하며 작은 규모의 석곽묘이다. 이곳에서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내용의 벽화가 발견되었다. 고려시대에 유행하였던 십이지신상은 나타나지 않으며 벽면에는 다양한 물건을 들고 행진하는 남녀 인물상과 매화죽석(梅畵竹石)을 번갈아 배치하였으며 천정에는 천문도가 그려졌다. 남서벽에 그려진 안장을 얹은 말의 고삐를 잡은 인물들의 묘사 방식은 원대 회화와의 관계를 보인다. 매화죽석은 문인화의 일종인 고목죽석도(枯木竹石圖)와 유사한 형식이지만 고목 대신 매화를 그리고 있다.
1456년에 축조된 노회신묘(盧懷愼墓)는 강원도 원주에 위치하며 우리나라의 마지막 벽화 고분이다. 노회신(14151456)은 왕실의 외척으로서 세종의 처조카이자 문인화가인 강희안(姜希顏)의 이종사촌형이다. 노회신묘는 하나의 봉분에 2개의 석곽을 갖추었다. 이중 1호실의 각 벽면에는 현무를 비롯한 사신도가 묘사되었으며, 그 아래로 십이지신상으로 보이는 인물상이 그려졌다. 천정에는 천문도가 보인다. 이와 같은 구성은 고려 후기의 수락암동 고분벽화와 유사하여 박익묘와 달리 고려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대의 장례 미술로서 꽃피웠던 우리나라의 고분벽화는 사후관과 후장 풍습이 변화하면서 벽화의 전통이 점차 약화되었다. 고구려에서부터 고려로 이어져 온 고분벽화의 전통은 조선 초 박익묘와 노회신묘에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