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벽화 ()

무용총 수렵도
무용총 수렵도
회화
개념
무덤 안의 천장이나 벽면에 그려 놓은 그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무덤 안의 천장이나 벽면에 그려 놓은 그림.
개설

고분 벽화는 고대 회화의 제작 과정, 표현 기법과 수준, 안료 및 아교 제조술 등 여러 가지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고대 사회의 생활 풍속·신앙·종교·사상 등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어 역사·문화 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무덤 칸에 벽화를 그리는 방법에는 벽이나 천장 면에 직접 그리는 조벽지법(粗壁地法)과 회칠을 하여 벽면을 고른 후 그리는 화장지법(化粧地法)이 있다. 화장지법은 다시 회가 마르기 전에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습지 벽화법[프레스코법]과 회가 마른 후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건지 벽화법[세코법]으로 나뉜다.

조벽지법에 의한 벽화는 매우 선명도(鮮明度)가 높다. 그러나 외부 공기에 노출되거나 습기의 침투를 받으면 안료가 탈색되는 경향이 있어 이미 발굴된 고분 벽화의 경우 보존상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야기시킨다.

화장지법에 의한 벽화는 그림의 선명도가 떨어지는 흠이 있다. 그러나 안료의 산화(酸化)와 퇴색이 상대적으로 덜하여 오랜 시일이 흘러도 처음의 명도(明度)와 채도(彩度)가 잘 유지되는 편이다. 제1기와 제2기로 분류되는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대부분 이 습지 벽화법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일부 건지 벽화법으로 그려진 부분도 있다.

한편, 제3기로 분류되는 고구려 고분 벽화는 석면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조벽지법으로 그려져 일부 고분 벽화의 경우에는 아직도 그림 속의 사신이 살아 꿈틀거리는 듯 생생하다.

고분 벽화는 성격상 장의 미술(葬儀美術)에 속하므로 공예화적인 요소를 짙게 지닌다. 때문에 고분 벽화를 그릴 때에는 습지 벽화법의 경우, 먼저 볏짚이나 갈대 따위를 잘게 썰어 넣어 반죽한 진흙을 바른다. 그 위에 다시 생석회와 모래를 짓이겨 만든 회반죽을 1∼3cm 두께로 칠한다.

그 다음에는 모본(模本)에 따라 묵이나 목탄, 먹 바늘 등으로 밑그림을 그린 후 채색을 한다. 따라서 밑그림이 어설프거나 그림 주제의 변경이 필요하게 되면, 다시 얇게 회칠을 더한 다음 밑그림을 새로 그리는 경우도 있다.

채색 안료로는 녹청석·군청석·진사(辰砂)·자토(紫土)·황토(黃土), 금과 같은 광물질 가루를 투명성이 높고 점액성이 낮은 특수 아교에 개어 썼다. 색채는 갈색조를 바탕으로 흑색·황색·자색·청색·녹색 등을 자주 써 무덤 칸 내부가 화려하면서도 부드럽고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대 사회의 초기에는 사람이 죽은 뒤에 가는 세상이 현재의 세상과 모든 점에서 같다고 보았다. 때문에 고대에는 지배자들이 현세에서의 신분과 지위를 내세에도 누리기 위해 죽으면서 처첩과 시종, 관리와 무사, 노비를 무덤에 함께 묻게 하였다. 이를 순장(殉葬)이라고 한다.

그러나 죽은 이의 세계에서는 현세의 사람과 물건이 별 쓰임새가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자 무덤 안에는 실물대신 모형(模型)이 묻히거나, 더 나아가 생전의 영광을 기리고, 누리고 싶은 내세의 삶을 형상화한 그림이 그려지게 되었다.

우리 나라 삼국시대의 경우, 신라와 가야에서는 모형을 껴묻는 습속이 오랫동안 지속된 반면,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무덤 칸 안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유행하였다.

현재까지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시기의 고분 벽화는 2세기 말경에 만들어진 평양의 낙랑(樂浪) 채협총(彩篋塚)벽화이다. 한(漢) 낙랑군 관리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채협총의 앞칸 서벽(西壁)에서는 사냥 그림의 일부로 보이는 기마 인물 2인과 도보 인물 1인의 그림이 발견되었다.

이 채협총벽화는 중국 한대(漢代)에 무덤 칸을 화상석(畫像石)이나 화상전(畫像塼), 혹은 벽화로 장식하고 관(棺) 표면에 각종 그림을 그리며 죽은 이를 백화(帛畫)로 덮는 것이 크게 성행한 것과 맥이 닿는 유적이다.

채협총벽화가 중국 한대에 유행하던 무덤 장식 습속이 한반도에서 재현된 것이라면, 삼국과 가야의 고분 벽화는 한국 고대 사회의 주인공들이 직접 남긴 유적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현재까지 모두 90여 기 가량이 발견된 삼국시대의 벽화 고분 가운데에는 고구려(평양·안악 지역 68기, 집안·환인 지역 23기)의 것이 가장 많다. 고구려에서는 벽화 고분이 대략 3세기 말이래 7세기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고 벽화의 내용과 구성 방식, 표현 기법, 분위기 등도 시기에 따라 바뀐다.

삼국시대 고분 벽화의 주제로는 보통 생활 풍속·장식 무늬·사신(四神) 등이 선택된다. 생활 풍속을 주제로 한 고분 벽화에는 주로 묻힌 자의 살아 있을 때의 생활 가운데 기념할 만한 것과 풍요로운 생활 모습을 그린다.(그림 1)

무덤 내부는 대부분의 경우 무덤 칸 각 방 모서리와 벽에 붉은색 안료로 기둥과 들보·두공 등 목조 가옥의 골조를 그려 죽은 이 생전의 저택처럼 보이게 한다.

장식 무늬로는 불교의 정토(淨土)를 상징하는 연꽃무늬가 즐겨 선택된다. 이외에 동심원무늬·보륜무늬[寶輪文]·구름무늬·얽힌 용무늬[交龍文]·인동초롱무늬 등이 혼합적으로 쓰여지기도 한다.(그림 2) 장식 무늬는 생활 풍속 및 사신의 배경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독립적인 벽화 주제로 선택되기도 한다.

사신은 본래 사방(四方)의 방위신으로 하늘의 28개 별자리[28星宿] 가운데 동서남북 각 방위의 7별자리씩을 나타내는 존재이다. 무덤 칸 안에 그려질 때에는 방위 혹은 방향에 맞추어 좌(左 : 東)청룡, 우(右 : 西)백호, 전(前 : 南)주작, 후(後 : 北)현무의 순서로 그려진다.(그림 3)

사신은 묏자리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사신 형상의 지세인 사세(四勢)에 해당되지 않거나 최선의 자리가 아닐 경우, 이를 대신하여 그려진다.

벽화 고분의 천장부는 흔히 하늘 세계를 상징하는 해와 달, 북두칠성 등의 별자리 및 별자리 신앙과 관련된 선인(仙人)·천인(天人), 상상 속의 상서로운 동물[祥禽瑞獸]들로 장식된다.(그림 4, 5) 또한 무덤에 묻힌 자 및 그 일족의 종교 및 내세관에 따라 천장부의 장식 요소가 바뀌기도 한다.

무덤 칸 천장부에 연꽃무늬나 여래와 보살, 비천(飛天)과 기악천(技樂天) 등을 그려 죽은 이의 내세정토왕생(來世淨土往生)을 기원한 불교 계통의 벽화가 있는가 하면, 용이나 기린, 학 등을 탄 선인들과 불로초(不老草)와 각종 상서로운 새와 짐승을 그려 신선이 노니는 이상향에서의 내세 삶을 추구한 도교(道敎) 계통의 벽화도 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

고구려 고분 벽화는 제작 기법·벽화 주제 등의 변화 및 전개 과정상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제1기는 3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치는 시기이다.

두방이나 여러방 무덤에 생활 풍속 그림이 즐겨 그려지고, 외방무덤에는 사신이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생활 풍속이 주제인 벽화 고분은 무덤 칸 구조와 벽화 내용이 죽은 이 생전의 저택 구조를 재현하거나 상징적으로 드러내도록 서로 맞물리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무덤은 흔히 무덤 칸 모서리와 벽상부(壁上部)에 붉은색 안료로 기둥과 들보·두공 등 목조 가옥의 골조를 그려 고분을 주택과 같이 꾸민다. 목조 가옥의 골조는 장식 무늬가 주제인 같은 시기의 고분 벽화에서도 흔히 그려진다.

그러나 사신(四神)이 주제인 고분 벽화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고분 벽화의 주제로 생활 풍속 및 장식 무늬가 선택될 경우와 사신이 선택될 경우의 초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인 듯하다. 사신이 하늘의 28별자리가 형상화된 존재라는 점이 참고가 된다.

제1기 고분 벽화의 중심 주제는 생활 풍속이나, 사신 혹은 장식 무늬가 벽화 주제인 무덤도 여러 기 있다. 생활 풍속 위주의 벽화 고분 가운데에는 무덤 칸이 2개 이상인 여러방 무덤이 많은 반면 사신이 벽화 주제인 무덤은 무덤 칸이 1개인 외방무덤이 많다. 요동성총(遼東城塚)과 같이 생활 풍속과 사신이 함께 그려진 벽화 고분도 있다.

생활 풍속은 죽은 자 생전의 공적(公的) 생활 가운데 기념할 만한 것과 사적(私的) 생활의 풍요로움을 무덤 안에 그림으로써 내세에도 이와 같은 삶이 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택해진 벽화 주제이다.

때문에 생활 풍속을 주제로 한 고분 벽화에서는 묘 주인(墓主人)이 홀로, 혹은 부인과 함께 앞방의 곁방 안벽이나 널방 안벽에 정좌한 채 남녀 시종들의 시중을 받는 장면, 대행렬(大行列)에 둘러싸여 출행(出行)하는 장면, 산야(山野)를 질주하며 사냥하는 장면, 연회를 베풀고 노래와 춤, 곡예를 즐기는 장면 등이 자주 나온다.

벽화 속의 인물들은 흔히 신분과 계급 정도에 따라 다른 사람의 몇 배 혹은 몇 분의 1 크기로 그려진다. 그리고 모자와 머리 모양, 입은 옷의 무늬와 빛깔의 다양성, 소매나 가랑이의 너비와 길이 등이 다르게 묘사된다.

생활 풍속을 주제로 한 평양·안악 지역 고분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안악3호분(安岳3號墳)과 덕흥리벽화고분(德興里壁畫古墳)을 들 수 있다. 안악3호분(357년)은 바깥방, 앞방과 좌우 곁방·회랑·널방으로 이루어진 여러방 무덤으로 구조상 중국 후한대(後漢代)의 벽화 고분과 맥이 닿는다.

덕흥리벽화고분(408년)은 무덤길, 앞방과 통로,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으로 5세기 초에는 고구려 일반 귀족의 저택이 사랑채와 안채로 나누어졌음을 알게 한다. 앞방에는 유주13군태수배례도(幽州13郡太守拜禮圖), 신임관리접견도 등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손님을 맡거나 공적 업무를 처리하는 장소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널방에는 연못·누각·창고·마구간과 외양간, 마사희(馬射戱) 및 칠보 공양(七寶供養)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안채는 놀이 및 휴식과 사적(私的) 행사를 위한 생활 공간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생활 풍속이 주제인 평양 지역 고분 벽화의 인물들은 대개의 경우 맞섶이나 오른섶에 소매와 통이 넓은 중국계 복장을 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지역에 채협총과 같은 중국계 목곽덧널무덤을 남긴 낙랑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제1기에 속하는 집안 지역의 벽화 고분으로 생활 풍속이 벽화 주제인 무덤으로는 각저총(角抵塚)·무용총(舞踊塚)이 잘 알려져 있다. 각저총은 널방 왼 벽의 커다란 나무 옆에서 노인을 심판으로 삼고 씨름 중인 중앙아시아계 인물과 고구려인의 모습으로 잘 알려진 무덤이다.

그리고 무용총은 널방 왼 벽의 노래하고 춤추며 묘 주인을 배웅하는 14인 가무도(歌舞圖)와 파상 선무늬로 단순화된 산악과 역동적인 사냥 장면이 잘 어우러진 오른 벽의 사냥도로 잘 알려진 무덤이다.

무용총은 제1기로 편년되는 집안 지역 벽화 고분 가운데 벽화에 사신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무덤이기도 하다. 이 시기 집안 지역 고분 벽화의 인물들은 흔히 고구려 특유의 점무늬가 있는 왼섶 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져, 평양 지역 고분 벽화 인물의 일반적인 복장과 대조를 보인다. 왼섶은 북방 유목계 복장의 특징적 요소이다.

제2기는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에 걸치는 시기로 외방 혹은 두방무덤에 생활 풍속과 사신, 혹은 생활 풍속과 장식 무늬가 공존하는 그림과 장식 무늬만을 주제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진다. 이 가운데 주류를 이루는 것은 평양·안악 지역에서는 생활 풍속과 사신, 집안 지역에서는 생활 풍속과 장식 무늬가 공존하는 벽화이다.

생활 풍속과 사신이 함께 나타나는 평양·안악 지역의 생활 풍속 계열 무덤에서는 초기 단계에는 사신이 무덤 칸 천장부에 하늘 별자리와 함께 그리 높지 않은 비중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생활 풍속 장면과 벽의 위·아래를 나누어 표현되며 서서히 벽면에 가득 차게 그려진다. 반면에 생활 풍속 그림의 벽화 내 비중은 점차 낮아지다가 결국은 소멸한다.

사신 계열의 무덤에서는 생활 풍속 그림이 일시 함께 그려지는 듯하다가 곧 사신 위주로 바뀐다.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고분 벽화의 주제로서 생활 풍속보다는 사신이 선호되었기 때문이다.

무덤 칸 천장부 그림의 일부에 불과하여 벽화 내 비중이 낮은 단계의 사신은 문헌상으로 전하는 갖가지 동물의 형상적 특징을 어색하게 합성시킨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벽면의 반(半) 이상을 차지하는 단계에 이르면 상상 동물 특유의 신비성을 갖춘 사실적 형태로 그려진다.

생활 풍속과 장식 무늬 혹은 장식 무늬가 벽화 주제인 무덤은 집안 지역에서 다수 발견된다. 벽화의 장식 무늬로는 동심원문(同心圓文)·王자문, 연꽃무늬 등이 선택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꽃무늬를 주제로 한 경우가 벽화고 분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들 연꽃무늬는 5세기에 들면서 고구려에서 불교가 크게 유행한 것과 관련이 깊다. 무덤 칸 안에 그려진 연꽃무늬는 죽은 이의 정토왕생(淨土往生)을 희구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제3기는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전반에 걸치는 시기로 널방만 있는 외방무덤에 사신 그림이 즐겨 그려진다. 평양·안악 지역의 제3기 고분 벽화로 대표적인 것은 진파리4호분(眞坡里4號墳)·내리1호분(內里1號墳)·강서대묘(江西大墓)·강서중묘(江西中墓)를 들 수 있다.

집안 지역의 벽화 고분으로는 통구사신총(通溝四神塚)·오회분5호묘(五盔墳5號墓)·오회분4호묘(五盔4號墓)를 꼽을 수 있다.

이들 무덤은 모두 구릉 기슭에 남향(南向)으로 축조되었으며 뒤로는 산을 지고 앞으로는 들을 내다보는 곳에 위치하였다. 이 시기 고분 벽화의 사신은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유일한 표현 요소로 단순히 하늘 별자리가 형상화된 방위신 정도가 아닌 죽은 이의 세계를 지켜 주는 우주적 수호신이다.

제3기 평양 지역 고분 벽화에서 사신은 6세기 남조(南朝) 미술의 영향을 짙게 받고 있는 진파리1호분과 진파리4호분의 예를 제외하면 배경 표현을 가능한 한 배제한 상태에서 묘사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에 반해 집안 지역 고분 벽화에서는 사신이 복잡하고 화려한 배경 위에 표현되는 경향을 보여 준다.

사신 자체의 표현도 평양 지역이 세부 묘사를 과감히 생략하고 색조의 조화와 동세(動勢) 표현을 중시하는 반면, 집안 지역은 색채의 강렬한 대비와 치밀한 세부 묘사에 치중하는 등 두 지역이 똑같이 사신을 벽화의 주제로 삼으면서도 그 표현은 서로 차이를 보인다. 평양과 집안 사이에는 문화 풍토와 기질의 차이가 고구려 말기까지도 상존하였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백제의 고분벽화

백제의 벽화 고분으로는 공주 송산리6호분(松山里6號墳) 및 부여능산리벽화고분(陵山里壁畫古墳)이 있다. 고분 벽화의 보존 상태는 매우 나빠 송산리6호분에서는 사신(四神)의 흔적만 확인되었다.

능산리벽화고분에서는 널방 벽의 사신 중 백호 머리 부분 일부, 천장의 인동연꽃과 흐르는 구름무늬 일부만 식별이 가능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중국 남조식(南朝式) 벽돌무덤인 송산리6호분벽화는 두껍게 회를 칠한 일부 벽면 위에 묘사되었다. 그리고 백제식 평천정 돌방무덤인 능산리벽화고분의 벽화는 편마암 판석 위에 회칠 없이 그려졌다.

송산리6호분벽화는 흔적으로 보아 화면(畫面)을 사신만으로 구성한 점에서는 고구려의 영향을 보여 준다. 백호(白虎) 머리를 자연계의 호랑이나 표범처럼 그리고, 주작(朱雀)을 널방 문 윗벽에 배치하는 등 사신의 위치와 형태에서는 남조 양식의 수용을 보여 준다.

한편 능산리벽화고분의 꽃잎이 넓고 끝이 비교적 부드러우며 원점형(圓點形) 꽃술을 지닌 연꽃에서는 6세기 고구려 평양 계열 고분 벽화와의 관련이 엿보인다. 흐르는 구름 끝에 가해진 음영(陰影)은 남조(南朝) 및 고구려 회화에도 보이는 기법이다.

공주·사비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기의 벽돌무덤과 수많은 돌방무덤 가운데 현재까지 발견된 벽화 고분은 2기에 불과하다. 이로 보아 백제에서는 무덤 안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예외적인 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송산리6호분에 사신이 그려진 것은 웅진시대의 백제 지배층이 중국식 벽돌무덤을 받아들이면서 당시 남북조(南北朝) 및 고구려에서 크게 유행하던 사신(四神)에 의한 사자 보호 관념(死者保護觀念)을 수용한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가야의 고분벽화

신라의 고분 벽화로는 순흥에서 발견된 읍내리벽화고분(邑內里壁畫古墳)과 어숙술간묘(於宿述干墓)의 벽화가 있다. 읍내리벽화고분은 남향의 외칸 돌방무덤으로 기미중묘벽화고분(己未中墓壁畫古墳)으로도 불린다. 479년, 또는 539년에 축조된 것으로 믿어진다.

널방 문과 네 벽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널방 문 좌우에는 역사(力士)를, 널방 왼 벽에는 산악(山岳)과 원안에 그려진 새를 묘사하였다. 널방 앞벽에는 선형기(鮮形旗)를 든 인물을 그렸으며, 인물 위에는 묵서명(墨書銘)을 썼다.

오른 벽에는 담에 둘러싸인 가옥과 버드나무를 그렸고, 안벽에는 왼 벽에서 이어지는 산악과 연꽃·서조(瑞鳥)를 묘사하였다. 천장에는 아무 것도 그리지 않았다.

제재의 표현 수준이 5세기 초 고구려 고분 벽화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구체적인 생활 풍속 장면이 보이지 않고, 왼 벽과 안벽에 연이어 산악을 그려 넣는 등의 벽화 배치는 순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벽화 구성상의 지방화(地方化) 때문인 듯하다.

역시 남향의 외칸 돌방무덤인 어숙술간묘는 널방 돌문의 안쪽 면에 '乙卯年於宿知述干(을묘년어숙지술간)'이라는 명문(銘文)이 있다. 축조 시기는 595년으로 추정된다.

석회 면 위에 그려졌던 벽화는 대부분 탈락하여 널길 천정의 연꽃과 돌문 바깥 면에 그려졌던 세 인물의 그림만 일부 남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연꽃은 꽃술이 죽순 모양으로 표현되는 등 고구려나 백제 계통의 연꽃과는 다른 신라화(新羅化)된 것이다.

그러나 주름진 넓은 치마를 걸친 두 귀부인과 바지를 입은 귀부인 1/4 크기의 시녀(侍女)로 이루어진 듯한 세 인물상은 고구려 쌍영총벽화(雙楹塚壁畫) 중의 귀부인 공양 행렬(貴婦人供養行列)을 연상시킨다.

이들 두 벽화 고분은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지이던 순흥에서 발견된 점, 벽화에 고구려적 요소가 담겨 있는 점 등으로 보아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벽화 고분으로는 고령 고아동벽화고분(高衙洞壁畫古墳)이 유일하다. 고아동벽화고분은 남향의 돌방무덤이면서도 구조는 백제 공주시대의 벽돌무덤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6세기 중엽 백제의 후원을 받으며 신라의 압박에 대항하던 대가야(大伽倻)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벽화는 회칠 위에 그려졌다. 그러나 현재는 널길 천정과 널방 벽 상부에 연꽃무늬와 구름무늬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연꽃무늬의 넓고 둥근 꽃잎, 물방울형 꽃술 등은 백제계 연꽃무늬의 일반적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무덤 구조 뿐 아니라 벽화 내용과 표현 기법도 백제로부터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고분벽화

삼국시대 이후 고분 내부를 벽화로 장식하는 풍습은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약화된다. 통일신라의 고분으로 전형적인 벽화 고분의 사례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널방 벽면에 12면 색띠가 남아 있는 경주의 전신덕왕릉(傳神德王陵, 917년)의 경우가 벽화 고분에 가까운 유일한 예이다.

붉은색·누런색·푸른색·흰색 등으로 병풍처럼 칠해진 12면 색띠는 통일신라시대 고분 장식에서 애용되던 십이지(十二支)를 상징한 표현으로 해석되고 있다.

발해의 벽화 고분으로는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龍頭山)에서 발견된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를 들 수 있다. 묘비(墓碑)에 의하면 정효공주는 발해 3대 문왕(文王)의 넷째 딸로 792년 사망한 인물이다. 벽면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다. 먼저 먹으로 윤곽을 잡은 다음 채색하고 붓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널방의 동·서·북벽에 시위무사·악사(樂士)·시종 등 10명의 인물을 실물 크기로 그렸다. 다홍색·적갈색 등 붉은색을 중심으로 푸른색·검은색, 흰색 등이 더해진 채색이 선명하고 인물의 모습이 뚜렷하며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다. 8세기 말경 발해의 복식과 생활상을 알리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벽화 고분으로는 개성의 현릉(玄陵), 개풍의 수락암동1호분(水落岩洞1號墳), 장단의 법당방석실분(法堂坊石室墳), 파주의 서곡리고려벽화묘(瑞谷里高麗壁畫墓), 거창의 둔마리벽화고분(屯馬里壁畫古墳) 등이 있다.

대부분 평천정의 네모반듯한 모습의 상자형인 고려의 벽화 고분은 무덤 칸 내부에 회칠을 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벽화가 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널방 벽에는 십이지상(十二支像)을, 천장에는 별자리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수락암동1호분과 같이 널방 벽의 상부에는 십이지상을, 하부에는 사신(四神)을 배치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둔마리벽화고분과 같이 석곽 벽(石槨壁)에 천녀(天女)를 비롯한 인물들과 남녀의 무용 장면을 묘사한 예도 있다.

십이지상은 보통 문관복(文官服) 인물 머리의 관(冠) 위에 십이지(12支)의 머리를 그려 나타냈다. 조선시대에는 왕릉(王陵)의 널방 벽에 사신(四神)을, 천정에 일월성신(日月星辰)을 그렸음이 ≪국조오례의 國朝五禮儀≫에 의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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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古文化綜鑑』 卷四(梅原末治·藤田亮策 編, 養德社, 1966)
『集安の壁畵墳とその變遷』(東潮, 1988)
『好太王碑と集安の壁畵古墳 讀賣テレビ放送 編』 (木耳社, 1988)
「고구려고분벽화연구-내세관 표현을 중심으로-」(전호태,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7)
집필자
전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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