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10월조선고적연구회(朝鮮古蹟硏究會)가 발굴할 당시 ‘남정리 제116호분’으로 명명하였다. 대동강 남안 석암리로부터 동남향으로 이어지는 낮은 구릉의 북쪽 기슭 자락부분을 이용해 축조하였다.
봉토(封土)는 남북 20m, 동서 23m로서, 대략 방형(方形)을 이룬다. 내부주체시설인 목실은 봉토로부터 6.55m 깊이에 있는 암갈색의 점토질 토대 위에 형성되었다. 목실은 남북을 장축으로 큰 각재를 사용해 축조되어 대(大)·소(小) 2실(室)과 묘도(墓道)로 이루어졌다.
남쪽에 위치한 주실(主室)은 남북 4.52m, 동서 3.35m의 장방형이다. 부장품실(副葬品室)인 전실(前室)은 남북 2.22m, 동서 4.85m의 가로로 세장(細長)한 평면형이다. 따라서 평면형은 묘도쪽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ㅗ’자형을 띄고 있다.
전실의 바닥은 이중으로 되어 있다. 먼저 길이 약 2.7m, 너비 18∼29㎝, 두께 약 15㎝의 각재를 남북을 장축(長軸)으로 듬성하게 가설하였다. 다시 그 위에 길이 약 5.6m 내외, 너비 30㎝ 내외의 판목(板木)을 동서를 장축으로 촘촘히 가설하였다. 주실 바닥도 이중으로 되어 있다. 아래는 남북을 축으로 5m가 넘는 각판재(角板材)를 나란히 깔았으며, 그 위로는 다시 동서를 축으로 각판재를 촘촘하게 깔았다.
벽면축조에 있어서도 전실은 너비 25㎝ 정도의 각재를 가로로 9층 내지 10층까지 쌓아올려 2.4m 정도 높이의 벽면을 만들고 끌이나 대패로 조잡하게 다듬었다. 주실은 전실과 접한 북벽을 제외한 나머지 세 벽(壁)은 한대(漢代) 전축분(塼築墳)의 벽면축조와 유사한 형태를 띄고 있다.
가로로 눕혀 쌓은 각재 위에 세로로 눕힌 각재 십 여 개씩을 나란히 놓아 한 층을 만든 후, 다시 그 위에 가로로 하나의 각재를 눕혀놓는(벽의 바닥면에 3, 4열 정도 목재를 덧대었음) 방식을 모두 11층이 될 때까지 반복함으로써 2m 정도 높이의 벽면을 만들고 있다.
주실 내에는 남북을 장축으로 3개의 목관(木棺)을 안치하였다. 중앙에 설치한 내곽(內槨)을 경계로 서쪽에는 길이 2.5m가 넘는 붉은 칠의 대형 목관을 두고, 동쪽에는 대형과 소형(약 1.9m) 2개의 검은 칠 목관을 병렬로 안치하였다. 그 주위에도 역시 관을 둘러싸고 내곽을 가설해 관을 보호하도록 배려하였다. 보고자는 전자를 주인 남자로, 후자 둘을 처첩으로 추정하였다.
전실 서반부의 벽면에서는 주(朱)·황(黃)·백(白)·흑(黑) 등의 색을 사용한 벽화가 확인되었다. 목재의 균열과 부식 등으로 인해 뚜렷하지는 않으나, 가장 상태가 좋은 서벽에서는 2명의 기마인물상(騎馬人物像)과 1명의 도보인물상(徒步人物像)이 확인되었다.
전실에서 밖으로 이어지는 묘도는 전실의 북벽 가운데에 설치하였다. 높이 1.6m, 너비 63㎝의 커다란 판목(板木) 2개를 나란히 설치해 문〔木扉〕을 만들었다. 묘도 바깥으로는 이 목판문 외에 크기가 다른 각재 5개씩을 입구를 향해 나란히 눕혀 7단(段)으로 쌓아 입구를 한층 엄중하게 폐쇄하고 있다. 또한 묘도 위에 가로로 설치된 각재 위에는 벽돌을 몇 층 쌓아올린 흔적도 있어, 상당히 특수한 예를 보이고 있다.
천장은 삼중으로 견고하게 쌓았는데, 주실은 벽면을 쌓은 각재처럼 긴 판목을 사용하였다. 반면에 전실은 남북으로 2개의 들보〔梁〕를 등간격으로 설치해 전체를 3구역으로 나눈 다음, 비교적 짧은 판목을 3열로 걸치는 방법을 택하였다. 목실(木室) 바깥에는 점토를 덮어 내부시설을 보호하였다.
유물은 대부분 전실에서 발견되었다. 주실에서는 동쪽 벽면 아래 바닥에 1열로 놓여 있는 목마(木馬) 5개와 목제인형의 팔·다리가 다수 출토되었다. 북벽 아래에서는 문설주〔楔〕·망치〔槌〕 등 각종 목제품과 부식된 견포(絹布)가 출토되었다. 3개의 목관 내에서는 머리 장식품을 비롯해 각종 은제품과 오수전(五銖錢)·화천(貨泉), 그리고 인골(人骨) 등이 발견되었다.
후실 벽면과 내곽 사이에서는 목마(木馬) 6마리와 그 파편 여러 조각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그 동쪽 부분에서는 5마리의 목마가 한줄로 배치되어 있었다. 후실 벽면과 내곽 사이에서 출토된 목마는 ‘S’자형태를 가진 재갈이나 가죽띠 등의 마구가 장착된 것이 있고, 안장이 장착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마차용으로 추정한다. 그 밖에 내곽 내부, 전실 동쪽 남벽 부근, 묘도에서도 목마편이 발견되었고, 마차 명기(明器)로 추정되는 것으로서 전실과 묘도에서 일산살꼭지〔靑銅製蓋弓帽〕·금구부칠봉(金具附漆棒)·칠차폭(漆車輻)·칠차륜편(漆車輪片) 등이 출토되었다.
전실에는 서쪽 벽에 붙여둔 2.2m×1.1m 크기의 탁자 위아래에 채문칠권통(彩文漆卷筒)·동경(銅鏡)·칠제연개(漆製硯蓋)·연대(硯臺)·채문칠안(彩文漆案) 등 많은 부장품을 안치하였다. 그 주위에도 이배(耳杯)를 비롯한 칠기(漆器)가 다수 놓여 있었다. 전실 중앙부에는 묘도 가까이에 놓인 채화칠협(彩畵漆篋)을 위시해 벼루〔硯〕와 칠쟁반〔漆盤〕 등이 있었다. 그 동쪽으로는 ‘고리조선승(故吏朝鮮丞)’ 운운의 묵서(墨書)가 있는 목찰(木札)과 채화칠협의 덮개·채문칠갑(彩文漆匣)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부장되었다. 이 밖에 전실 곳곳에는 밤이 다수 널려 있었다.
유물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채화칠협이다. 이것은 질이 좋은 대나무 껍질을 사용해 만든 길이 39㎝, 너비 18㎝, 높이(덮개포함) 17㎝ 정도의 상자이다. 네 귀와 덮개의 윗면과 옆면에는 흑칠바탕 위에 주·적·황·녹·다갈색 및 엷은 흑색 등을 사용해 각종 문양과 함께 100여 명에 이르는 인물화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중요 인물 옆에는 일일이 효혜제(孝惠帝)·상산사호(商山四晧)·대리황공(大里黃公) 등으로 인명을 써넣었다. 이 특색 있는 유물로 인해 이 고분이 ‘채협총’으로 불리게 되었다.
전한(前漢)∼후한(後漢) 중기에 걸쳐 성행했던 목관은 수혈식인데 반해, 전축분은 횡혈식으로 후한 중기부터 동진(東晋)에 이르는 시기까지의 일반적인 묘제였다. 이 점을 감안하면, 채협총은 그 중간시기의 과도기적 특수형으로 대략 후한 말기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부장품 가운데 화려하게 옻칠한 대나무 상자는 중국 한나라 때의 회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