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당시는 ‘영흥읍 유적(永興邑遺蹟)’이라고 했으나, 뒤에 북한에서 행정구역 및 명칭변경으로 금야군이 되면서 ‘금야유적’이라고 한다. 1964년에 발굴 조사되었으며, 350×150㎡의 유적범위에서 10기의 집터가 발견되었다.
집터는 움 깊이 20∼30㎝의 낮은 장방형 반움집터로 바닥에는 기둥구멍이 남아 있지 않고, 화덕자리도 2호 집터에서 1개, 10호 집터에서 2개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집터의 크기는 5.2∼70㎡까지 다양하다.
출토된 토기는 모래가 섞인 적갈색 민무늬토기와 고운 바탕흙의 검은 토기의 두 종류가 있다. 전자에는 젖꼭지손잡이가 달린 깊은 바리모양의 구멍무늬토기, 후자에는 평행선무늬가 시문된 미송리형 토기에 가까운 토기가 있다.
석기로는 도끼ㆍ반달칼ㆍ홈자귀ㆍ돌살촉 등과 함께 십자형 칼자루끝장식이 출토되었고, 부채도끼[扇形銅斧]ㆍ청동방울[銅鐸]ㆍ동모(銅矛)의 활석제 거푸집도 출토되었다. 청동기의 거푸집이 집터에서 출토된 것은 그 예가 드문 것으로, 청동기의 제작이 국내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영흥읍 유적의 출토유물 중 구멍무늬토기ㆍ미송리형 토기ㆍ젖꼭지손잡이ㆍ부채도끼 등을 통해 압록강 중상류 및 두만강유역의 종족들과의 문화적 관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홈자귀ㆍ반달칼 등에서 중부지방 청동기시대 주민들과의 접촉도 살펴볼 수 있다.
영흥읍 유적에서 나타나는 문화유형은 금야유형문화로도 불리며 용흥강을 중심으로 한 함경남도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출토유물의 성격상 청동기시대 후기에서 초기철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