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탑은 점토를 장방형으로 빚어 말린 뒤 가마에서 구워 만든 벽돌로 쌓은 탑이다. 전탑(磚塔), 전탑(甎塔), 벽탑(甓塔) 등으로도 표기한다. 전탑 건립 시점은 분황사 모전석탑을 근거로 선덕여왕 때로 추정하고 있다. 모전석탑(模塼石塔)과 전탑은 축조 방식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으나 돌과 벽돌이라는 재료 차이가 분명하다. 전탑은 경주 석장사지 전탑 유적을 시작으로 울산 농소읍 중산리 사지 전탑, 청도 불영사 전탑, 대구 송림사 전탑, 청도 운문사 작압전, 창녕 전탑, 여주 신륵사 전탑 등을 제외하면 안동 지역에 밀집해 있다.
전탑은 구운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탑으로 전탑(塼塔), 전탑(磚塔), 전탑(甎塔), 벽탑(甓塔) 등으로 표기한다. 인도 재래의 탑은 전탑과 모전탑이 동 시기에 함께 조성되었는데, 중국에서는 목조건축의 누각식(樓閣式) 불탑 형태의 전탑 축조가 유행했다. 불교 유입 과정에서 인도 불탑의 재료가 함께 전해졌기 때문에 중국에서 전탑이 유행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돈황(敦煌), 토로번(吐魯蕃) 등 초기 불교 유입 지역에는 소성하지 않고 햇빛에 말린 벽돌로 만든 불탑이 남아 있어 이 지역 건축 재료의 특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벽돌을 불에 굽지 않은 것은 건조 지역에서 땔감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며, 강수량이 적은 지역이기 때문에 건조한 벽돌만으로도 불탑 축조와 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후 중국에서 건립된 산시성(陝西省) 숭문탑(崇文塔), 시안(西安) 대안탑(大雁塔) 등은 높이 60~70m에 달하는 고층으로 축조되었다. 중국은 한대(漢代)부터 중층 누각식 건축물을 축조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응현 목탑으로 불리는 산시성 불궁사 석가탑(佛宮寺 釋迦塔)은 높이 67.31m로 숭문탑과 비교되는 대형 목탑이다. 이처럼 중국은 대형 전탑과 목탑을 함께 건립했는데, 구조적으로는 목조 건축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점은 인도 불탑과 구별되는 큰 차이점이다. 전탑은 화재에 강하고 원하는 형태로 탑부재(塔部材)를 만들 수 있어 목탑과 석탑에 비해 짧은 시간에 대형 탑을 세우는 데 유리하다. 반면 소형의 벽돌을 개별적으로 쌓아 만들었기 때문에 지진 등에는 취약하다.
한국에서의 전탑 건립 시작은 분황사 모전석탑을 근거로 선덕여왕 때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모전석탑(模塼石塔)과 전탑은 축조 방식에서 일부 유사점을 찾을 수 있을 뿐 돌과 벽돌이라는 재료상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오히려 『삼국유사』 양지 사석 조(良志 使錫條)의 양지 스님이 영묘사 전탑을 덮은 기와와 그가 주석했던 석장사(錫杖寺)에 벽돌을 이용한 탑을 세웠다고 하는 기록을 통해 독자적인 전탑 건립이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점은 중국과 한국의 전탑이 벽돌을 사용한 재료의 공통점을 제외하면 구조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양지 스님은 선덕여왕(632~647) 때부터 679년(문무왕 19)까지 활동했던 인물이었기에 늦어도 선덕여왕 이전에는 전탑이 신라 땅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는 직접적인 전탑 건립을 확인할 순 없지만, 발해의 영광탑(靈光塔) 등을 통해 전탑 건립 시기의 추정이 가능하다.
대형의 탑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상부 구조물을 안정적으로 지지하기 위한 기초 공사와 기단 축조가 필요하다. 전탑 역시 판축 공법(版築工法) 등으로 기초를 보강한 후, 벽돌을 이용해 탑신과 옥개부(屋蓋部)를 조성했다. 완성된 전탑은 목탑, 석탑과 구조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기단이 낮은 단층 기단은 같지만, 목조 건축의 의장(意匠)을 살린 우주(隅柱)와 탱주(撐柱)를 표현하지 않고 지붕의 공포(栱包)를 살린 옥개석으로 층급을 만들었으며, 낙수면(落水面)을 계단 형태로 단순하게 처리했다.
중국 요서(遼西) 지역의 요대(遼代) 전탑은 공포와 다양한 불보살상을 조각한 벽돌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한국 전탑은 옥개석 상하가 계단식으로 대칭을 형성한다. 방형 벽돌이 갖는 재료의 한계 때문이겠지만, 9세기 이후 건립되는 모전석탑 중에는 의성 빙산사지 삼층 석탑,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 남산리 사지 삼층 석탑처럼 의도적으로 낙수면을 계단식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어, 석탑과 모전 및 전탑이 양식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판단된다.
모전석탑의 기단은 낮은 단층으로 조성되었는데 벽돌을 지면에 직접 쌓을 경우 내구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화강석 등의 석재를 이용해 기단을 보강했다. 초층 탑신에는 목조 건축의 출입 시설을 상징하는 감실(龕室)이 위치하는데, 문비(門扉)를 화강석으로 조성했다. 옥개석 처마 선은 낙수면 중앙에서 좌우 끝까지 수평을 이루며, 안동 신세동 칠층 전탑과 같이 기와를 얹기도 했다. 또한 표면에 백색 회가 일부 남아 있어 벽돌 사이를 메우거나 표면에 식물이 자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장용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 파키스탄 등지의 불탑은 표면에 회를 바른 후 채색이나 불보살을 그린 사례가 조사되기도 했다.
한국 전탑은 경주 석장사지 전탑 유적을 시작으로 울산 농소읍 중산리 사지 전탑, 청도 불영사 전탑, 대구 송림사 전탑, 청도 운문사 작압전, 창녕 전탑, 여주 신륵사 전탑 등을 제외하면 안동 지역에 밀집 · 분포한다. 안동에 전탑이 집중된 것에 대해 고유섭(高裕燮)은 “안동이 사찰로 가득 차 있어 성관(盛觀)을 이루던 시대에 중국 전탑을 직접 본 승려 또는 공장이나 혹은 당으로부터 도래한 공장 등이 어떤 종교적 관계로 본나(本那)에 재류하여 유력한 자금을 얻어 이 조선으로는 웅대하다고 평할 7층, 5층 전탑을 조립할 수 있었다."라고 했다. 김원룡은 “신라기의 전탑이 안동 부근에 모여 있는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것은 안동 부근에 조탑(造塔) 재료 입수 문제와 관련있다.”라고 했다. 진홍섭은 『영가지』에 "법흥사 전탑, 법림사 전탑, 일직대 전탑, 임하사 전탑, 월천 전탑 등이 기록되어 있고 그 중 앞 3기는 현존하며, 이밖에도 금계동 화인사지 전탑, 서후면 개목사 전탑, 북후면 전탑이 확인되었다. 동으로 제천, 서로 영양, 북으로 정선, 남으로 의성, 군위, 선산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모전 탑파가 전파되고 있음은 하나의 장관인 동시에 특이한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임세권은 "안동의 불교 문화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유적은 전탑이다. 전탑은 안동 지역에만 분포하고 있으며, 안동 이외의 것은 시기적으로 늦은 것들로 안동의 전탑 문화가 다른 지역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았다. 박홍국은 전탑 안동 집중설을 부정하고 경북 집중설을 주장했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을 제외하면 안동 지역이 모전과 전탑 모두 가장 빠른 축조 시기를 보이는데, 경주에서 칠곡을 거쳐 영양, 안동, 제천과 여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중심으로 전탑이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경로는 경주에서 불교가 외곽으로 전파되는 경로와 동일하며 전탑 역시 경주에서 경상도 북부 지역으로 확산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현재 안동 지역에는 조탑동 오층 전탑, 신세동 칠층 전탑, 동부동 오층 전탑, 임하사지 칠층 전탑, 옥산사지와 개목사지 전탑지가 알려져 있다. 이들 전탑은 모두 기단을 화강석을 이용해 단층으로 축조하고 그 위로 벽돌을 쌓아 방형의 탑신과 옥개부를 형성했다. 상륜부는 대부분 남아 있지 않아 원형을 알 수 없지만 기단과 같이 화강석을 이용해 노반 등 상륜 시설을 설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탑동 오층 석탑은 기단뿐 아니라 초층 탑신까지도 화강석으로 축조했고, 남면 중앙에 사각형 감실을 마련한 후 좌우에 판석을 이용해 인왕상을 조각했다. 이러한 양식은 목조 건축의 의장과 같으며, 의성 탑리 석탑의 목조 건축 양식과 친연성을 살필 수 있다. 이처럼 한국 전탑은 비록 벽돌로 건립되었음에도 목조 건축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며, 석탑에서 감실을 문비 형태로 간략히 표현한 것과 달리 사실적인 내부 공간을 마련한 점이 주목된다.
전탑에 사용된 벽돌 표면에는 다양한 문양을 표현했는데 석장사지에서 출토된 탑상전에는 초층 탑신 중앙에 아치 구조의 감실 표현과 불탑 좌우로 여래좌상을 조각했다. 이밖에 보상화문 등 다양한 문양을 시문한 것으로 보아 전탑에 불국토를 구현하려고 했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석장사지 탑상문전(塔像文塼)에 등장하는 불탑은 아치가 표현된 전탑, 불국사 삼층 석탑과 유사한 전형 양식 석탑이 함께 표현되었으며, 울산 농소사지 출토 전에는 단층과 이중 기단을 갖춘 석탑 및 목조 건축을 표현했다.
고려 때 건립된 여주 신륵사 전탑 벽돌에도 일부 연화문과 연주문 장식 등이 남아 있다. 벽돌 표면에 문양을 표현한 것은 앞서 언급한 전탑 표면을 보호하기 위해 회칠(灰漆)한 것과 상반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문전을 사용한 경우 회칠로 전탑 표면을 덮어 보호했고, 문양전을 사용했을 경우 회칠을 하지 않았을 가능이 크다.
『고려사』에는 영주에 무신탑(無信塔)이라는 전탑이 있었는데 정습인(鄭習仁)이 헐어 객관 수리에 사용했고, 태조 왕건이 금천(衿川) 안양사(安養寺)에 칠층 전탑을 건립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까지 전탑이 꾸준히 건립되었으나 조선시대는 기존 전탑을 보수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더 이상 건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