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룡은 해방 이후 『신라토기의 연구』, 『한국미술사연구』 등을 저술한 미술사학자이자 문인이며 화가이다. 1922년에 태어나 1993년에 사망했다. 1945년 경성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위원(현,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위원)으로 활약하다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고고학과 미술사 분야의 개척자로 100여 편의 논문과 1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한국고고학개설』(1973), 『한국문화의 기원』(1977), 『한국미술사연구』(1987) 등이 있다. 한국고고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를 주창하였다.
평안북도 태천에서 1922년 8월 24일에 출생하였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호는 삼불(三佛)이다. 1929년 평안북도 영변보통학교 입학하였으나, 1931년 서울로 이사하여, 혜화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1935년 제일고보(경기중학, 경기고)를 거쳐, 1940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 1942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동양사 전공)에 입학, 1945년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54년에서 1959년까지 미국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미술사 전공)을 수학하였고, 『신라토기의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8년에서 1992년까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위원(현,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위원), 1961년부터 1987년까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이 기간 동안 역사학회 회장 및 국사편찬위원회 편찬위원직을 역임하였다. 1971년부터 1974년까지 한국고고학연구회 회장, 1970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민국학술원 회원(고고학)이었다. 1985년에서 1987년까지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원장, 1990년에서 1993년에는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김원룡은 한국고고학과 미술사분야의 개척자로서 그가 이룬 학문적 업적은 대단히 높이 평가된다. 특히 그는 1970년대 초에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Proto-Three Kingdoms Period)라는 용어를 주창하였다. 1960년대 말까지의 학계 분위기는 『삼국사기』에 언급된 백제 · 신라 등의 건국시점은 믿을 수 없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1964년도 풍납토성 내부를 직접 발굴 · 조사한 김원룡은 이 토성의 축조시기를 기원후 1세기경으로 비정하였다. 아울러 삼국시대의 시작, 특히 백제 등의 건국 시점을 삼국시기의 기년(紀年)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삼국사기』 등 문헌기록에 따르면 분명 삼국시대이지만 『삼국지』 「위서」 ‘동이전’ 등 당대의 중국측 문헌기록상으로 보면 아직 완전한 국가 상태에는 도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이 시대를 ‘삼국시대 원초기(三國時代 原初期)’ 또는 ‘원사(原史) 단계의 삼국시대’라는 의미로서 ‘원삼국시대’로 부르자고 제안하였다. 이 기간에 해당되는 김해기 또는 웅천기 각지 유적의 방사성탄소연대가 대체로 A.D 0∼300년 사이에 들뿐 아니라 실질적인 삼국시대의 시작을 300년으로 보는 문헌사학계의 견해를 종합하여 원삼국시대의 시기 폭을 기원전 · 후부터 기원후 300년경으로 설정하였다.
이후 한국고고학에서는 원삼국시대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다만 원삼국시대를 대신하여 ‘삼국시대전기’로 하자는 견해가 제기되는 등 고고학계 내부에서도 약간의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원삼국시대라는 용어에 대한 문제점은 고대사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먼저 원삼국시대라는 용어가 ‘원사(原史)단계의 삼국시대’라는 의미보다는 ‘원초(原初)단계의 삼국시대’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며, 문헌사에서 1∼3세기를 원사(原史)단계가 아니라 역사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고, 서로 발전과정이 다른 고구려 · 백제 · 신라를 이 개념 속에 포함시킬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문화적인 성격을 고고학 측면에서 살펴보더라도 1∼3세기의 문화적인 특색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이 시대를 문헌사의 시대구분인 삼국시대 혹은 삼한시대로 하던지 아니면 고고학의 시대구분인 초기철기시대 혹은 철기시대로 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후 부산 경남 등 고고학자들을 중심으로 ‘삼한시대’라는 시기 구분 명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호남지역 등에서는 일부 고고학자에 의해 ‘철기시대’가 원삼국시대를 대치하기도 하고, 충청, 전라 지역을 마한의 옛 땅이라 보아 이 지역의 원삼국시대를 ‘마한시대’라 하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최근에는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라는 용어가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인정과 서울 풍납동 토성(사적, 1963년 지정)의 발굴 등으로 인한 최근 한국고대사의 긍정적 해석으로 철기시대 전기(서기전 300∼서기 1년)와 후기(삼국시대 전기, 서기1∼300년)로 점차 바뀌어 나가고 있다.
한편 한국 선사시대 문화의 시베리아 기원설도 시대별 · 지역별로 나타나는 다양한 문화적 차이에 따라 복합적 · 다원적인 연구로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루어놓은 여러 분야의 연구는 후배 · 제자들에 의해 꾸준히 심화 확대되고 있다. 특히 미술사 분야에서는 그가 표본처럼 편년했던 『한국미술사』가 최근 그의 제자인 안휘준(安輝濬)에 의하여 공저로 다시 간행되어 종래 학설을 가감 · 수정되어, 세부적인 사항들이 구체화되고 있다.
학문연구 업적으로는 100여 편의 논문 외에 고고학과 미술사학계에서 회자되고 있는 저서만 해도 10여 권에 이른다. 『신라토기의 연구』(1960), 『한국미술사』(1968), 『한국고고학개설』(1973), 『한국문화의 기원』(1977), 『한국미의 탐구』(1978), 『한국벽화고분』(1979), 『한국고미술의 이해』(1981), 『한국고고학연보』(1974∼1987), 『신라토기』(1981), 『한국고고학연구』(1987), 『한국미술사연구』(1987), 『신판한국미술사』(1993) 등이 있다. 그밖에 『울릉도』(1963), 『무령왕릉』(1973), 『신창리 옹관묘지』(1963), 『풍납리 포함층조사 보고서』(1967), 『흔암리 주거지』(1973), 『석촌동 발굴조사보고』(1975) 등의 보고서가 있다.
이러한 학문적 업적 이외에도 수필과 문인화를 포함한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수필집으로는 『삼불수상록』(1970), 『노학생의 향수』(1978)와 『하루하루와의 만남』(1985) 등이 있고, 유고집으로 『나의 인생 나의 학문』(1996) 등이 있다.
한국 고고학과 미술사 분야를 개척하고 크게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시 문화상(1961), 3 · 1문화상, 홍조근로훈장(1971), 학술원 공로상(1981), 인촌상(仁村賞:1988), 일본 후쿠오카 아세아 문화상(1993)을 수상하였다. 타계 직전에 제3회 ‘자랑스런 서울대인’과 문화체육부의 은관문화훈장(1993)을, 그리고 타계한 뒤에 제4회 호암상(湖巖賞) 예술상(1994.3.22. 시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