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제국대학 ()

경성제국대학
경성제국대학
단체
1926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대학.
단체/학교
개교 시기
1926년
설립지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후신
서울대학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경성제국대학은 1926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대학이다. 1924년 5월 1일 칙령 제103호로 「경성제국대학관제」가 공포되어 경성제국대학 직원과 총장의 역할 및 예과 설치가 확정되었다. 같은 날 발포된 칙령 제104호에는 경성제국대학 학부에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설치할 것과, 그 시작을 1926년 4월 1일로 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가 되었다.

정의
1926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대학.
설립 배경

1910년 말부터 조선 민족주의 진영이 민립 대학 설립인가를 요구하였지만, 일본 내각과 조선총독부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1923년 이상재(李商在)를 대표로 하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 발족을 계기로 민립대학설치운동이 일어났다. 전국적인 모금책을 두고 조직적으로 전개되는 이 운동을 보고, 조선총독부와 일본 내각은 서둘러 임시교육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조선에 관립 대학을 설치하기 위한 조선제국대학창립위원회를 발족하였다.

1924년 5월 1일에 칙령 제103호로 「경성제국대학관제」가 공포되었는데, 여기에는 경성제국대학의 직원 및 총장의 역할과 예과(豫科)를 설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같은 날 발포된 칙령 제104호는 경성제국대학 학부를 법문학부와 의학부로 할 것과, 그 시작을 1926년 4월 1일부터 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24년 제국대학에 입학할 학생을 위해 2년제 예과가, 1926년에는 3년제 법문학부와 4년제 의학부가 설치되었다. 총장으로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政務總監)이 취임하였다.

변천 및 현황

당시 법문학부에는 법과 · 철학과 · 사학과 · 문과의 4개 학과가 있었다. 1929년 4월에 법문학부 제1회 졸업생 90명[한국인 22명]이 배출되었으며, 1930년에는 의학부 졸업생 55명[한국인 12명]이 배출되었다. 1934년부터 예과는 3년제로 변경되었다. 1930년대 전시 동원 체제가 구축됨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과학과 고등 기술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1938년부터 이공학부에 진학할 예과생을 모집하기 시작하였고, 1941년부터 정식으로 이공학부가 신설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이 되었고,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에 따라 서울대학교가 되었다.

교육 활동

경성제국대학에는 문과와 이과로 구성된 수업연한 2년의 예과를 두었는데, 이는 경성제국대학 진학을 위한 예비교육기관이었다. 예과에 입학하면 시험 없이 학부로 진학하는 방식을 취하였으므로, 경성제국대학 입시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시를 의미하였다.

예과의 시험과목은 모두 일어로 되어 있어 조선인들에게는 처음부터 접근이 쉽지 않았다. 시험과목은 문과와 이과로 구분되었는데, 전자에는 국어 및 한문, 외국어, 수학, 역사가, 후자에는 국어 및 한문, 외국어, 수학, 박물이 포함되었다. 이 가운데 ‘국어 및 한문’과 ‘외국어’ 과목은 조선인 학생들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특히 일본의 고대어로 써진 문학을 일본 현대어로 해석하는 내용은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 학생들에게도 어려운 문제였다.

경성제국대학 예과 설치 이래 식민지 기간 내내 조선인 학생들의 입학 비율은 전체 입학생의 1/3 정도를 나타내었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관립 고등교육기관에 다니는 조선인의 비율을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인 학생들에게 불가능의 범주에 속하는 문제가 출제되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경성제국대학 예과 시험에서 또 하나의 절차는 입학 지원자의 사상 검증이었다. 예과에 지원서를 제출한 학생들을 형사가 찾아다니며 신분 조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 입학한 학생들 중에서도 반일 운동에 참가하는 학생은 있었다. 1931년 3월경 법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조선인 예과 학생들의 비밀결사 단체인 독서회(讀書會)가 여기에 포섭되어 반제부(反帝部)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이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 제이고등보통학교 · 경신학교(儆新學校) · 법학전문학교 · 기독교청년학관 등의 학생들이 반제경성도시학생협의회를 조직하고 출판노동조합을 이끌면서 반제 · 반전(反戰)의 각종 책자와 신문, 격문(檄文) 등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경성제국대학의 졸업생 상황을 보면, 법학과를 이수한 학생은 학사 시험을 거쳐 법학사가 되었고, 고등문관과 외교관, 영사관, 사법관 등의 시험을 볼 수 있었다. 문학부를 이수하여 문학사 자격을 얻은 학생들은 법정 과목에 대하여 중등교원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의학부를 이수한 학생들은 학사 시험을 거쳐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병원에 취직하거나 개업할 수 있었다.

경성제국대학은 1926년에 개교하여 1929년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의학부는 4년제였으므로 첫 회 졸업생은 법문학생뿐이었다. 제1회 졸업생은 일본인 43명, 조선인 25명으로 총 68명이었다. 이 가운데 조선인은 관공서와 학교로 진출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는데, 관공서에는 법학과 출신이, 학교에는 철학과와 사학과, 문학과의 문학부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사회의 상층부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였고, 8·15광복 이후 독립국가에서도 그 지위가 여전히 유지되었다. 정계와 관계, 학계 등의 모든 분야에서 주요 직책을 맡으며 지배 엘리트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단행본

정선이, 『경성제국대학 연구』(문음사, 2002)
이충우, 『경성제국대학』(다락원, 1980)
『조선제학교일람(朝鮮諸學校一覽)』(조선총독부학무국, 1920~1940)
大夜謙一, 『朝鮮敎育問題管見)』(京城: 朝鮮敎育會, 1936)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