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학교는 1905년 한성부 연지동에 설립되었던 증등 과정의 기독교계 사립학교이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가족·사회·국가·세계와 하나님께 봉사하며, 최대한도까지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고, 나아가서는 목회자 양성에 전력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39년 3월 김홍량이 교지와 교사를 매수하였으며, 1941년에 학교를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전하였다. 8·15광복 후 남북분단으로 김홍량이 학교를 운영할 수 없게 되자, 1946년 김규식이 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51년에 3년제 경신고등학교와 경신중학교로 개편되었다.
1905년 중등 과정으로 설치된 경신학교는 1885년 미국 기독교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Horace Grant, 元杜尤]가 자택에서 학생을 모아 가르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조선에 입국하여 3일 만에 광혜원(廣惠院)에서 화학(化學)과 물리학(物理學)을 가르치면서 한국에서의 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1886년에 한성 정동(貞洞)의 건물을 빌려 교사(校舍)로 사용하며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에 대해 길모어[Guilmore, George William, 吉毛]는 “언더우드가 접촉하였던 일부 남아(男兒)들이 처하여 있는 실정으로 보아, 그는 고아원 설치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이 계획을 한국 사람을 통하여 알게 된 국왕(高宗)은 이를 승낙하였다. …… 처음에 들어온 아이들은 모두 남아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기관에서 먹이고 재우고 가르치게 된 아이의 수가 40명 이상이 되었다”라고 밝혔다.
언더우드는 학생들에게 한문과 초보 영어, 성경, 찬미와 기도 등을 가르쳤다. 초기 언더우드학당의 교사로 언어우드와 알렌, 헐버트, 헤론, 게일, 목원홍, 윤치경, 정태용, 정동명 및 선교사 부인들이 활약하였다. 학생으로는 송순명과 안창석, 김유순, 김규식, 이익채 등이 있었다.
1891년 2월 모펫[Moffet, Samuel Austin, 馬布三悅] 선교사가 언더우드학당을 맡으면서 고아원 형태의 정규학교로 전환하였으며, 이름을 예수교학당으로 바꾸었다. 학교의 목적은 “그들의 동족에게 진리를 전하는 설교자와 교사로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모펫은 학생들이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하였고, 방학 기간에는 노동을 통해 자립정신을 심어 주었다.
또한 학당 내에 실업부를 두고 실업교육을 실시하여, 장차 사회에 진출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이때 교육과정은 한문과 한글, 성경, 영어 등이었는데, 1892년에는 작문과 필기, 독서, 받아쓰기, 철자법, 산술, 한국의 역사와 지리, 체조 등으로 늘어났다. 입학 연령은 기존에는 4세~20세 전후였으나, 1891년에는 10세로 하였고 수업연한은 5년으로 하였다.
1892년 11월부터 학당을 맡게 된 밀러[Miller, F. S., 閔老雅] 선교사는 이름을 민로아학당으로 바꾸고, “자국민에게 [복음의] 진리를 간증할 전도인과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한글과 성경 이외에 더 많은 교과를 가르치고자 하였다. 1893년에는 보통반과 특별반으로 나누어 기초교육에서부터 높은 수준에 이르는 단계별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수공과를 설치해 실업교육에도 힘썼다. 학생 수는 처음에는 10여 명이었으나 1890년에는 29명, 1894년에는 46명으로 늘어났고, 그 가운데 15명은 기숙사생이었다. 그러나 민로아학당은 1897년 복음 전도 사역의 긴급성과 고등교육에 대한 토착 기독교인의 수요 저조, 학교에 대한 만족스럽지 못한 위상, 학교를 책임질 적합한 사역자의 부족 등을 이유로 폐쇄되었다.
민로아학당이 문을 닫은 지 4년 후인 1901년에 서병호(徐丙浩)와 민충식, 이덕중 등 6명의 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예수교중학교가 연못골 한성부 연지동[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에 설치되었다. 당시 연못골 교회를 이끌던 선교사 게일[Gale, James Scarth, 奇一]은 교회의 부속 한옥을 교사로 정하여 남학생을 상대로 중등교육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경신학교의 전신이다. 1902년 북장로교 선교본부는 남자 중등학교 예산으로 4,675달러를 책정하였고, 연지동 1번지에 학교 대지를 매입하였다. 초기의 교과목은 성경과 학문 독본, 한국 문법 이외에 영어, 한국사, 교회사, 천문학, 자연사, 지리학, 물리학, 화학, 산술, 대수 등의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등록된 학생 수는 1902년 13명, 1903년 20명, 1904년 29명, 1905년 49명으로 점차 증가하였다.
1904년 북장로교 선교본부는 선교 개시 20주년을 맞이해 기념행사를 계획하고, 미국 선교본부 회장 웰즈[John D. Wells]를 초청하였다. 이후 그가 기부한 6,300달러로 2층 건물의 교사인 존 디 웰스 기념관을 완공하였고, 1905년에 학교 이름을 경신학교로 바꾸면서 중등학교로서의 모습을 확실히 하게 되었다.
경신학교의 설립 목적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가족 · 사회 · 국가 · 세계와 하나님께 봉사하는 인격을 완성함과 동시에, 각자의 능력과 적성과 흥미를 스스로 탐구하여 최대한도까지 자기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며, 나아가서는 목회자 양성에 전력하는 것’이었다.
1905년 새롭게 설립된 경신학교의 직원으로는 교장 이하 11명의 교사가 있었다. 이들 중에는 해외의 새로운 풍조와 문화를 받아들여 조선 교육의 부흥으로 삼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재적생은 162명이었으며, 매월 출석생은 150여 명이었다. 1906년 연동예배당을 교사로 정하여 경신소학교를 부설하였다. 1910년 언더우드 교장, 밀러 부교장, 김규식(金奎植) 교감, 서병호 학감 체제 아래에서 외국에서 유학한 자를 교원(敎員)으로 채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1913년 1월에는 경신소학교와 정신소학교를 통합하여 교명을 보영학교(普永學校)로 고쳤다.
1913년 경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쿤스[Koons, E. W., 君芮彬]는 교훈을 자유 · 평등 · 박애로 정하고, 동족들에게 진리를 간증할 전도사와 교사 양성을 목표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1913년도부터 기독교 자제뿐 아니라 일반 학생에게도 입학을 허용하였다. 1914년부터는 조선선교연합회교육부 주도로 전도회에 소속된 국내 중등 남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연합 시험제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한편, 언더우드는 학교를 설립할 당시부터 대학의 증설을 꾀하였으나, 이때의 대학 설립은 재한 선교사 사이에서 그리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대학 설립을 인가받기 전까지 경신학교에 대학부(大學部)라는 이름으로 개설하였으며, 언더우드가 뜻을 굽히지 않고 노력한 결과 미국기독교북장로교와 남북감리교, 캐나다장로교 선교부연합위원회 관리의 연합대학 설립을 인가받았다. 이에 대학 이름을 조선기독교대학이라 칭하고 운영하였는데, 이 학교는 1917년에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가 되었다.
경신학교 졸업생 수는 증가와 감소를 반복하였다. 1918년 동급의 여러 학교들이 고등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은 반면, 경신학교는 성경 수업을 고집하여 인가를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동맹휴학이 나타나기도 하였으며, 1명의 졸업생도 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경신학교 출신인 서병호와 이갑성(李甲成), 김원벽(金元璧), 정재용(鄭在鎔), 김상덕(金尙德), 최재화 등의 인물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외국으로 망명하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1920년대 후반 이후 경신학교의 평균 등록생 수는 400명을 넘었다. 졸업생 수는 1930년대에 전반적으로 늘어났고, 1940년부터는 60명 이상으로 안정되어 가는 추세를 보였다.
1938년부터 강화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선교사들은 교육에서 물러난다고 선언하였고, 이에 따라 경신학교는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야 하였다. 결국 선교재단 대표자인 겐소[Genso, J. F., 金昭]와 김홍량(金鴻亮) 재단의 대행자인 최태영(崔泰永) 사이에 경신학교 재산에 대한 매매계약이 맺어졌고, 선교회 대표자 언더우드와 밀러, 최태영 명의가 김홍량 개인 명의로 변경되었다. 1939년 3월에는 김홍량이 교지와 교사를 미국 선교회 재단으로부터 매수함에 따라, 학교의 경영권이 완전히 그에게 넘어갔다. 1941년에는 학교를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전하였다. 8·15광복 후 남북분단으로 김홍량이 학교를 운영할 수 없게 되자, 1946년 김규식이 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47년 수업연한이 6년으로 연장되었다가, 1951년에 3년제 경신고등학교와 경신중학교로 개편되었다.
<표> 경신학교 변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