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초대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H.G.)에 의하여 설립된 우리나라 근대학교의 하나이다.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하여 3일 만에 광혜원(廣惠院)에서 화학(化學)과 물리학(物理學)을 가르침으로써 한국에 대한 봉사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그가 1886년 서울 정동(貞洞)의 자기 집에 붙어 있는 건물을 이용하여 고아원 형식의 학교를 창설하니, 이것이 곧 오늘의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이 기관을 설립하게 된 경위를 길모어(Gilmore,G.W.)는 “언더우드가 접촉하게 된 일부 남아(男兒)들이 처하여 있는 실정으로 보아, 그는 고아원 설치의 필요를 느끼게 되고, 이 계획을 한국사람을 통하여 알게 된 국왕[高宗]은 이를 승낙하였다. …… 처음에 들어온 아이들은 모두 남아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기관에서 먹이고 재우고 가르치게 된 어린이의 수효가 40명 이상이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언더우드는 1890년 9월 1일 피어슨(Pierson,A.T.)에게 보낸 편지에서 학원의 당시 상황을 명시하고 있다. “이 고아원에는 약 25명의 남아가 수용되어 있다. 그들은 방을 치우기도 하고, 자기 먹을 음식을 마련하기도 하면서, 학교운영에 필요한 일을 많이 하고 있다. 그들은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서 몸차림과 방을 잘 정돈해 놓고, 8시까지 한문을 공부하고, 외국인 선생들과 같이 아침 예배를 보고 나서 조반을 먹는다. …… 조반 후에 영어공부를 조금 하고 또 성경공부를 하였다. 이러한 수업시간 사이에 쉬는 시간을 넣었고, 오후에는 놀기만 하고 복습도 하고 한문(漢文)공부도 하게 되었는데, 한문공부는 한국인 교육에 요긴한 과목이다. 선교 본부에서는 이 학교에 대한 예산을 대폭 삭감할 수밖에 없게 되어 학교 유지가 큰 문제로 되어 있다.”
경신학교의 설립목적은 기독교정신 위에서 가족·사회·국가·세계와 하나님께 봉사하는 인격을 완성함과 동시에 각자의 능력과 적성과 흥미를 스스로 탐구하여 최대한도까지 자기 자신을 발전시켜 나감을 원조하고, 나아가서는 목회자 양성에 전력하는 것에 두었다.
당시 선교사의 보고 내용을 보면,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긴급하게 요구되는 사업 중의 하나는 한국인 목회자 양성이다. 그런데 복음(福音) 전도에 다년간 희생적인 봉사활동을 하여 온 이로서 그 복음을 전파할 목회자들을 양성할 기관이 한국 수도에 세워져서 그분의 영향력이 영속하도록 함은 극히 지당한 일이라.”고 하고 있는데, 초기의 학생들은 불신자(不信者)였지만, 경신학교 교육을 통하여 성서의 지식을 넓히고 신앙을 돈독히 하였다.
1901년에는 연지동에 대지를 구하여 이전하였다. 신입생 6명을 상대로 하여 운영하다가 밀의두(密義斗)가 교장이 되고, 1905년에 2층 건물의 교사를 신축하고 존 디 윌스 기념당이라고 칭하였다.
그 뒤 이 고아원 형식의 언더우드 학당은 예수교학당(1891년)·민노아학당(1893년)·경신학교(1905년)로 교명을 바꾸어 가면서 배재학당과 더불어 신문화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는데, 당시 김규식(金奎植)·안창호(安昌浩) 등도 이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6세 때부터 김규식은 언더우드에게 수양(收養)되어 이 고아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아명(兒名)은 본갑이, 교명(敎名)은 요한이었으며, 영어를 대단히 빨리 배우고 정확하게 구사하였다.
그는 17세 때에 미국에 건너가 23세에 버지니아 주 로녹(Ronoc)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6월에 프린스턴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1905년 귀국하여 언더우드의 일을 맡아 도왔다. 그 뒤로는 언더우드가 1887년에 세운 새문안교회 장로, 경신학교 교감, YMCA 총무 등을 맡으며 기독교계 지도자로 봉사했다.
1906년에 경신학교 내에 소학교가 부설되었다. 1901년 1월에 연동예배당에서 경신학교가 재기되었다 함은 전술한 바와 같거니와 1902년 교지(校地)를 연지동 1번지에 확보하고 교사를 신축한 뒤 초등교육기관까지 확대하고자 연동예배당에 교사를 정하고 경신소학교를 부설하였다. 1913년 1월에 이르러 경신소학교와 정신소학교는 그 교명을 보영학교(普永學校)라 개칭하고 통합했다.
1910년에는 언더우드(元杜尤) 교장, 밀의두 부교장, 김규식(金奎植) 교감, 한국 초대 유아 세례자인 서병호(徐丙浩) 학감 체제 아래 외국유학자를 교원(敎員)으로 채용하여 가장 모범적인 학교로 발전했다. 그 결과 3·1운동 때는 전국적으로 큰 역할을 담당하였고, 외국으로 망명하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한편 언더우드는 경신학교를 세울 때부터 이를 확장하여 대학의 증설을 꾀하려고 하였으나, 이 때 서울의 대학설립은 재한 선교사 사이에서 그리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언더우드가 뜻을 굽히지 않고 노력한 결과, 1915년 4월에 이르러 미국 기독교 북장로교, 남북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 연합위원회의 관리로 서울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을 빌려 연합대학의 설립인가를 얻기까지 경신학교 대학부(大學部)라는 이름으로 개학하게 되니, 이것이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의 시작이 되었다.
1938년부터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선교사들이 교육 총인퇴(總引退)를 선언하자, 경신학교도 후원자를 물색치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선교재단 대표자인 겐소와 김홍량(金鴻亮) 재단의 대행자인 최태영(崔泰永) 사이에 경신학교 재산에 대한 매매계약이 맺어지고, 선교회 대표자 언더우드와 밀러(Miller,E.H.) 그리고 최태영 설립자의 명의를 김홍량 개인명의로 변경하였다.
김홍량은 1939년 3월 3일부터 교지와 교사를 미국 선교회 재단으로부터 완전히 매수하였다. 김홍량은 구한말부터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를 설립하여 민족 지도자를 길러 온 인물이었기에, 선교회와 이사회에서는 김홍량이 일본인에게 이용당할 위험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학교 경영권을 이양한 것이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1957년 11월에는 현재 교사인 혜화동 산마루에 3층 철근건물에 15개 교실을 마련하여 입주하였으며, 1959년 12월 1일에 다시 15개 교실을 증축, 낙성하였다.
중학교 18학급과 고등학교 12학급이라는 교실부족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던 끝에 1963년 11월 23일에 4층 교사의 증축, 낙성을 보았다. 이에 따라 추가 11개 교실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부족하던 3개 정규 교실을 보충하고 도서실을 완비하는 한편, 각 과별 특별활동에 필요한 특활실도 마련하게 되었다.
이에 필요한 비용은 1963년 7월 18일에 있은 재단법인 경신학원 이사회의 결의사항과 동년 8월 3일에 있은 기성회 이사회의 결의사항에 근거하여 공사비 553만 원 중 3백만 원을 학교재단에서 부담하고 나머지 253만 원을 기성회가 부담하였다.
경신학교는 우리나라가 근대적 여명기(黎明期)를 계기로, 개화하기 시작할 때 그 산모적(産母的) 역할을 담당한 신학문의 교육기관이었다.
1886년에 개신교의 전래자인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정동에서 설립되고 연지동과 정릉동을 거쳐 해서 현 위치인 혜화동에 이르기까지 근 1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과 신학문의 사학 요람지로서 우리 민족이 겪어 온 파란만장한 풍운의 민족사를 짊어지고 장장 1세기를 꿰뚫으며 육영사업에 이바지하여 왔다.
그리고 그 사이 갓 쓰고 도포 입은 근대풍의 학원(學員: 학생)에게 침식·의복·월급까지 지원하며 가르치던 학당이 교모에 교복을 입은 현대풍의 학생에게 수업료를 받으며 원자학을 가르치는 학교로 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