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량서당 ()

제도
20세기 초, 교육 근대화의 흐름에 따라 이전부터 존재했던 서당을 시대에 맞게 개조한 비제도적 교육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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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개량서당은 20세기 초 교육 근대화의 흐름에 따라 이전부터 존재했던 서당을 시대에 맞게 개조한 비제도적 교육기관을 일컫는다. 한학 공부를 중심으로 운영된 초중등 단계의 서당을 근대적 교육내용이나 교육시설로 개량해 운영했던 초등단계의 교육시설이다. 서당은 식민정부의 통제가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교육기관에서 조선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교육적 요구를 충족시켜 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서당은 조선총독부의 엄격한 관리 아래 두어졌고 개량서당은 초등교육인구 확대를 위한 식민정책의 한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정의
20세기 초, 교육 근대화의 흐름에 따라 이전부터 존재했던 서당을 시대에 맞게 개조한 비제도적 교육기관.
내용

조선이 외세에 문호를 개방한 이래,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근대식 교육시설이 정부, 선교사, 민간들의 주도하에 속속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들 교육기관에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은 한정되어 있었고, 이전부터 각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던 서당을 개량하여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타났다. 서당개량론은 당시 교육정책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조선총독부뿐 아니라 교육의 대상이 되었던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전자는 서당의 개량화를 통해 기존의 서당이 가지고 있던 기능을 축소하면서 초등교육단계의 인구 확대를 꾀하려 하였으며, 후자는 새로운 내용 및 방법을 통해 교육의 기회를 획득하려 하였다.

개량서당의 설치는 전통적 방식으로 서당을 운영하다가 신학문의 필요를 느껴 새로운 교과를 추가하여 운영되는 경우와 처음부터 개량서당으로 신설되는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는 대부분의 개량서당이 취한 방식으로, 전통서당의 재산이나 촌락의 공유재산을 바탕으로 수리・확장, 혹은 다른 서당과 통합해 개량서당으로 전환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후자는 동네 유지(有志)를 중심으로 기금을 갹출하거나 동리에서 벌금이나 노역을 통해 재정을 확보하는 방법, 그리고 종교조직이나 선교기관 및 지역의 조직・단체가 기금을 모금해 설치하는 방법 등으로 설치되었다.

개량서당의 학생수는 많게는 191명에서 적게는 40여명에 이르는 분포를 보였지만, 일반적으로 6070명 정도를 수용하는 곳이 가장 많았다. 이들 학생을 가르치기 위한 교사(敎師)는 보통 23명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개량서당에서는 훈장이 아닌 교사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개량서당에서는 전통서당의 훈장이 새로운 과목을 공부해 가르치기도 했지만, 도청에서 순회교사를 배치하거나 사립학교의 선생을 초빙해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

1930년대 이후 조선총독부는 개량서당 가운데 군마다 1개의 서당을 선정해 ‘모범서당’이라 부르며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의 지원책을 실시하였다. 개량서당 중에서도 특히 우수성을 인정받은 모범서당의 경우 교사의 자격은 보통학교 졸업 이상으로 교원자격 소지자를 요구하는 곳이 많았다. 공주 귀산모범서당의 경우는 보통 1년에 400~500원 정도의 경비를 사용하는데 이를 국비나 지방비에서 보조를 받기도 하였다.

1935년 경기도에는 개량서당이 178개, 전통서당이 392개로, 총 570개의 서당이 있었다. 이들 서당에 속한 교사는 총 600명이었는데, 학력을 보면 중등교육을 받은 자가 20명[3%], 초등교육을 받은 자가 152명[25%], 이전에 보통학교 교사였던 자가 2명[1%], 한학 전공자가 426명[71%] 등이었다. 전통서당의 대부분은 한학전공자가, 개량서당은 근대교육을 받은 자와 일부의 한학전공자가 교사로 재직하였다고 볼 수 있다. 1933년 총독부에서 제시한 교사의 월급료는 경기 30원, 충북 25원, 충남 20원, 경북 30원, 황해 12.5원, 평남 30원이었다.

서당의 교과는 한문이나 유교경전과 함께 일본어, 조선어, 산술을 기본으로 가르쳤다. 이때 사용되는 교과서로는 전자의 경우는 『동몽선습(童蒙先習)』, 『천자문(千字文)』, 『사략(史略)』, 『격몽요결(擊蒙要訣)』 등 전통적 교재의 일부를 수정해 사용했고, 후자의 경우는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교과서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교수방법은 전통서당의 암기 위주의 방식을 벗어나 단체로 몇 시간씩 즐겁게 뛰어놀게 하거나 학예회, 운동회, 소풍 등의 비교과활동을 추진하는 서당도 있었다.

변천사항

통감부는 1908년 「서당에 관한 훈령」을 발포했는데, 보통학교 대신 서당에 다니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서당의 설립을 ‘보통학교가 없는 곳’으로 한정하였고, 내용도 한문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와 함께 기존의 서당이 가진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적절한 교수시간의 설정과 교실 및 설비의 개선 등을 분명히 하였다.

1910년 한일협약으로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치가 시작되었고 보통교육을 실시한다는 방침이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을 통해 명시되었지만, 그 추진을 위한 학교 설치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보통학교의 설치는 조선인 학령아동을 수용하는 데 미치지 못했고 조선인들은 사립학교나 서당을 통해 교육적 욕구를 해소하려 하였다. 1910년대 서당수와 서당에 다니는 학생수는 보통학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많았다.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의 정책은 한학 공부를 중심으로 하는 서당의 증설을 억제하면서 교육내용 및 방법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갔다. 1918년에 발포된 「서당규칙」에서는 서당의 설치와 폐지를 비롯해 서당 운영에 관한 제반 사항을 도지사에게 신고하도록 규정하였다. 이와 함께 한문 이외에 국어, 산술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하면서 서당의 개량화를 추진하였고, 서당에 보통학교와 비슷한 명칭을 쓸 수 없도록 하였다.

1929년에는 「개정 서당규칙」을 발포하여 서당의 설치 및 유지를 도지사의 ‘신고’에서 ‘인가’로 바꿔 서당의 설립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서당에서 사용하는 국어, 조선어, 산술 등의 교과서를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것으로 한정함으로써 교육내용의 관리・통제를 강화하면서 서당의 개량화를 꾀하였다.

1930년대 이후 조선총독부의 정책은 개량화된 서당을 점차 제도권으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설치와 운영을 비롯해 교사의 자격이나 교과서 사용을 모두 관에서 엄격히 관리해 나갔으며, 서당에 제도권의 초등교육을 보완해 가는 기능을 부여했다. “서당 학생들을 다 보통학교에서 수용할 수 없으니 응급책으로 우선 서당에서 산술, 일본어 및 기타 신교과"를 가르치라고 적극 권장했던 시바타 젠사부로[柴田善三郞] 학무국장의 담화나 “개량서당의 학력수준을 보통학교 2~4년 과정 이수와 같게 하고, 가능하면 서당교육 이수 후 적절한 절차를 거쳐 보통학교로 편입하도록”한다는 지방정부의 방침 등이 서당의 활용책으로 등장했다.

1934년부터는 간이학교 설치라는 새로운 제도가 실시되었다. 경상북도는 “간이학교를 설치하기 전에 먼저 서당을 정해 개조교육을 실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도내 1,300개의 전체 서당을 적극 원조하고 수준을 올려서 순차적으로 간이학교”로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1936년에 완성될 1면 1교의 목표 달성과 1면 2교 정책의 실현이 보통학교만으로는 어렵다는 상황을 인식한 결과로 개량화된 서당이 조선총독부의 초등교육인구의 확대정책을 위해 활용되었음을 말해준다.

의의 및 평가

개량서당은 식민정부의 통제가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교육기관에서 조선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교육적 요구를 충족시켜 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개량서당은 조선총독부의 엄격한 관리 아래 두어졌고 초등교육인구 확대를 위한 식민정책의 한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전통적 서당은 무학년제로 운영되었고 교육수준도 초등부터 중등단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나, 식민정부의 정책으로 서당은 비제도적 초등교육시설로 확정되었고, 이는 현재 우리의 일반적 인식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송찬섭, 『서당,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에서』(서해문집, 2018)
노영택, 『일제하 민중교육운동사』(탐구당, 1979)

논문

송숙정, 「일제강점기 개량서당의 일본어교육에 관한 연구」(『일본문화학보』 99, 한국일본문화학회, 2023)
김형목, 「일제강점 초기 개량서당의 기능과 성격」(『사학연구』 78, 한국사학회, 2005)
박종선, 「일제강점기(1920-1930년대) 조선인의 서당개량운동」(『역사교육』 71, 역사교육연구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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