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교육의 역사적 기원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정설이 없다. 논자에 따라서는 고구려시대의 경당(扃堂)과 같은 학교제도를 서당교육의 출발로 이해하기도 한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워 관학교육(官學敎育)의 출발로 삼는 한편, 민간교육기관으로서 경당을 두었다.
중국의 사료(史料)인 ≪신당서 新唐書≫와 ≪구당서 舊唐書≫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들은 책을 사랑하여 벼슬아치 집에서 평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저자거리에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부르고, 혼인하기 전의 자제들이 여기에서 밤낮으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경당에서는 문무겸비의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이는 신라의 화랑도와 마찬가지로 교육기관인 동시에 청소년들의 결사조직체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지닌 맹점은 경당의 사회적인 역할이 과연 어느 정도로 서당의 사회적 역할과 일치하였는가를 명확히 해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앞으로 경당에 대한 정밀한 성격규명이 있은 다음이라야 서당과의 상호 동질성과 이질성이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신라에서도 설총(薛聰)이 경서(經書)를 이두로 풀어서 제생(諸生:여러 학생)을 가르쳤다고 하였으니, 그가 가르친 곳이 사숙일 가능성이 짙고, 이 또한 서당교육의 연원의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는 경관(經館)과 서사(書社)라는 서당 형태의 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 高麗圖經≫에는, “여염집들이 있는 거리에는 경관과 서사들이 두셋씩 마주 바라보이고, 이곳에 백성의 자제들이 무리로 모여 스승에게 책[經]을 배우며, 조금 장성하게 되면 뜻이 맞는 사람끼리 벗을 택하여 절간으로 가서 글을 익힌다.
그리고 아래로는 코흘리개 어린이까지도 역시 향선생(鄕先生)에게 배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은 고려시대도 이미 조선시대의 서당제도와 같은 민간교육기관이 존재하였음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서당의 사회적 의미가 증대한 것은 16세기 사림파의 등장과 시기를 같이 하는 것으로, 중종대 사림파의 향약보급운동과도 일련의 연관성을 지닌다.
16세기 서당 설립의 주도 세력은 대부분 당시 향촌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명문사족 출신인 대토지 소유자였다. 예를 들면, 안동의 의성 김씨(義城金氏) 가문, 고평(高坪)의 청주 정씨(淸州鄭氏) 가문, 의성의 함양 박씨(咸陽朴氏) 가문 등이 그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당시 서당 설립의 주도 세력의 신분은 입사(入仕:벼슬한 뒤에 처음으로 그 벼슬자리에 나감) 이전의 생원·진사들이 주류였고, 설립의 명분은 대체로 반상(班常:양반과 상사람) 구별을 비롯한 유학적 질서율을 향촌사회에 정착시키려고 하는 데서 찾고 있다.
서당의 교육내용은 고급 성리서(性理書)를 위주로 하거나 과거응시를 목적으로 하는, 이른바 고제적 서당(高弟的書堂)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한편 서당의 설립은 관(官)의 지원을 최대한 배제하고, 경내 백성들의 공동체적 일체감 속에서 민간자산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양란 후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족들은 약화된 재지기반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서당을 중심으로 관권 및 외부 사림과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향리세력들이 향청(鄕廳)의 주도권을 위협하는 가운데 그들 사림들은 관권과 결합하여 서당을 설립하고, 수령을 직접 서당에 초치(불러서 이르게 함)하여 향민들을 대상으로 강회(講會)를 열고 상벌을 시행하기도 하여 향촌기반 구축에 부심하였다.
관변측(官邊側)으로서도 향교와 서원을 통한 향촌사회 통제에 한계성을 인식하고, 서당 설립 및 운영을 적극 지원하였다. 예로 평해(平海)에 설립되었던 소곡서당(蘇谷書堂)에 대한 조정 상신들의 지원과 수령의 운영은 서당 장악을 통하여 향권(鄕權)에 대한 관권(官權)의 우위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기도 하였다.
송준길(宋浚吉)의 <향학사목 鄕學事目> 및 당쟁의 정점에서 부침하던 홍여하(洪汝河) 및 박세채(朴世采)의 서당 설립과 운영은 당시 집권세력들의 향촌기지 구축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17세기에도 사족이 연합하여 서당이 설립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서당 설립과 운영은 다음 18세기적 양상과 같이 혈연 위주의 폐쇄적인 양상이 대종을 이루지는 않았다.
다수의 씨족이 몇 개의 자연촌을 대상으로 서당을 설립하였던 사례들이 이 시기에 나타난다. 당시 서당 설립 목적 중의 하나는 사회신분제의 동요를 억제하고, 엄격한 신분적 차등윤리를 향촌사회에 정착시키는 데 두는 것이었다.
또한 17세기까지는 아직 중인층을 비롯한 비사족(非士族) 계층이 서당 경영의 주체로 등장하지 않았다. 이것은 향후 18세기 후반기에 대두되었던 비사족 중심의 서당경영 및 서당교재 출현, 서당 훈장층의 민란참여 현상과 같은 중세적 신분제 사회 해체 현상이 심화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한편, 18세기 후반기에 들어 동족마을이 서당 설립의 가장 주요한 주도 세력으로 자리잡자 서당의 성격에도 뚜렷한 변화가 나타났다. 동족마을은 서당의 운영을 위하여 문중 중심의 화수회(花樹會)를 만들기도 하고, 학전(學田)과 학름(學廩)을 비치하기 위한 서당수호절목(書堂守護節目)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에 서당은 종손(宗孫)을 중심으로 한 종중(宗中)의 공동관리하에 두게 되었으며, 강학(講學)기능 이외 보족(保族)과 의가(宜家)를 위하여 문중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집행기능도 동시에 수행하였다.
특히 18세기 말 이래 서당에는 각 문중이 그들의 신분유지를 위하여 선조에 대한 향사(享祀:제사)기능을 두기도 하였다.
서당의 향사 대상은 선조 또는 종족(宗族)의 비조에 한정하는 가묘적 성격이 강하였다. 향사 인물이 문중 위주·혈연 위주로 한정됨에 따라 서당의 명륜교육도 가정윤리인 효(孝)의 문제로 축소되어 충(忠)과의 연계성을 위협받게 되었다.
또한 향사하기에 부적합한 인물을 향사함으로써 범사회적인 승인 및 통일성 확보에도 문제점이 뒤따랐다. 그러나 18세기에 설립된 동족마을 중심의 서당은 문약(門約)·동약(洞約)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운영됨으로써 마을 단위에 의한 경제적 지원을 확고하게 보장받을 수 있었다.
동족마을이 중심이 되어 서당을 자치적인 경제권하에 편입시키자 서당 운영에 대한 관권개입이 전반적으로 퇴조하고, 서당의 역할은 혈연 중심의 폐쇄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소규모의 자산으로도 운영이 가능한 서당계(書堂契)의 고안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던 평민층이 대거 서당을 운영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 밖에도 이 시기에는 평민 중심의 교재가 본격적으로 선보이고, 직업적 고용훈장이 등장하는 등 서당교육의 일대변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서당은 사립의 초등교육기관으로서 설립에 필요한 기본재산이나 법적인 인가를 요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존폐가 자유로웠으며, 필요에 따라 뜻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서당을 유지, 경영할 수 있었다. 서당의 종류는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사숙 또는 독서당(讀書堂)의 유형이다. 대개 문벌가나 유력가가 그들의 자제교육을 위하여 훈장을 초빙하고 교육경비를 부담하는 형태이다. 이들 훈장은 퇴관 지식인이거나 불우한 낙방거자(落傍擧子)들로서 지식 정도나 경륜이 높은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사숙 형태의 서당에는 그 가문의 자제와 일가친척의 자질들이 무료로 글방 벗이 되어 ‘동냥공부’ 또는 ‘어깨너머 공부’를 하는 수도 있었으며, 이따금 가숙용 교재를 개발하거나 간인(刊印:간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② 동계서당(洞稧書堂)의 유형이다. 양반계층이나 유력 자산가의 문중에서 학계(學稧) 또는 학전(學田)을 조직, 경영하면서 마을에다 서당을 짓고, 그들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문중서당이다.
이에는 학사(學事)를 담당하는 유사(有司)가 선출되어, 훈장에 대한 급여를 포함하여 기본재산의 관리를 맡았다. 또한 동계서당의 강당은 때로 문중의 회의장소로 활용되었으며, 향풍(鄕風)을 규찰하는 간이재판소의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훈장은 직업적인 유랑지식인이거나 마을의 유식한 촌로 가운데서 초빙하거나 선택하였으며, 그들에 대한 대우는 양식으로 쓸 쌀과 땔나무, 그리고 의복 정도였다.
일반 학부형이 염출하는 학자(學資)는 따로 없었지만, 독서 수료시에 이른바 ‘책걸이’라는 간소한 잔치를 베풀거나 계절에 따른 별식이 수시로 공궤(供饋:음식을 줌)되었으며, 하과(夏課)라는 계절학습에서는 집집마다 별도의 과외수업비를 내기도 하였다.
③ 훈장의 자영서당(自營書堂)이다. 훈장 자신이 집에서 생계유지나 소일을 위하여 개설한 서당이다. 이들은 촌학구(村學究) 또는 궁생원(窮生員)이라고 불릴 정도의 훈장이 대부분이어서, 교육하는 일 외 마을의 대서(代書)를 전담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유형의 자영서당은 이름난 고관이나 학자들이 만년에 자연을 벗하면서 후진을 가르치는 서당 또는 정사(精舍)와는 구별된다.
④ 문중연립서당(門中聯立書堂)이다. 이는 문중(동계)서당의 확대형으로서 지체가 비슷한 마을끼리 그 향촌사회에서 덕망과 학식이 뛰어난 스승을 모시고, 각 마을의 재능있는 청년 자제를 선택하여 교육시키는 고급서당이다.
이는 통혼권(通婚圈)이 같은 집안끼리 그 유대를 더욱 두텁게 하는 한편 같은 사문(師門)의 학통을 계승, 발전시키려는 교육문화적인 의도에서 설립된 서당이다.
교육장소로는 인근의 서원을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서당교육과 서원교육이 연결되는 성격을 지녔고, 이들의 교육기간은 연중 개설학교가 아니라 거접(居接:잠시 몸을 의탁해 거주함) 또는 하과와 같은 특별교육활동이 주된 것이었으며, 교육대상은 서원의 ≪원유록 院遊錄≫(일명 靑襟錄)에 올리기 이전 연령의 청소년이었기 때문에, 양반사회 진출을 위한 일종의 예비학교와 같은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경비는 계안(稧案)에 의하여 문중별로 갹출하였으며, 공동관리의 학전을 유지, 경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 동접(同接)들은 ‘○○계 자손록’에 기재되었다.
서당의 인적 구성은 훈장·접장(接長)·학도로 이루어진다. 훈장은 그 자격이 천차만별이었으며, 학식의 표준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經)·사(史)·자(子)·집(集)에 두루 통하는 자는 드물었고, 이들에 대한 사회적·경제적 지위는 열악한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일반적인 훈장상(訓長像)은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경전의 주석과 언해(諺解)를 보고 그 글의 대강의 뜻을 해득한 정도가 대부분이었으며, 심지어 벽촌의 훈장 가운데는 한자문의 활용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자도 있었다.
심한 경우 도망노예(逃亡奴隷)가 법망을 피하는 수단으로 학장 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글짓기[製述]로는 표(表)·책(策)·기(記)·명(銘)을 짓고, 시(詩)와 율(律)을 이해하는 자는 드물었으며, 겨우 사율(四律)을 빌려 옮기거나 십팔구시(十八句詩) 따위를 한 두마디 읊는 것이 보통이었다.
접장은 오늘날의 조교와 같은 성격을 지닌 일종의 보조교사이다. ‘접’이란 원래 ‘무리’라는 뜻을 지녔지만, 서당에서는 동급의 학도를 지칭한다. 고려시대의 사학(私學)인 도(徒)에서 접장제도가 발달하였다.
접장제도는 비교적 규모가 큰 서당에서 훈장 한 사람으로는 많은 학도를 일일이 가르칠 수 없을 경우, 학도 가운데서 나이와 지식이 많은 자를 뽑아 ‘접’의 장으로 세웠는데, 큰 서당에서는 접장의 수가 두세 명도 되었다.
접장은 스스로 훈장에게 수업을 받는 한편 자신이 속한 ‘접’의 하급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따라서, 접장은 하급생들에게 있어서 학업담당교사이자 훈육담당교사이고, 동문의 사형(師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접장이 서당 풍기(風氣)에 미치는 영향은 훈장보다 큰 경우가 많았다.
접장의 보수는 무료였으나 학비가 면제되기도 하였다. 서당의 학도(또는 학동)는 7∼8세에 입학하여 15∼16세에 마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20세가 넘는 경우도 많았다.
성별로는 남학생 위주의 교육이 원칙이었고, 여자를 위한 규방교육의 서당이 가숙(家塾)의 형태로 이따금 설립되기도 하였다. 여자를 위한 서당교육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의 개량서당이 보급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서당교육의 내용은 강독(講讀)·제술(製述)·습자(習字)의 세 가지였다. 강독의 교재는 기초적인 동몽교재(童蒙敎材)인 ≪천자문≫·≪동몽선습 童蒙先習≫·≪통감 通鑑≫ 및 사서(四書) 삼경(三經)과 부교재격인 ≪사기 史記≫·≪당송문 唐宋文≫·≪당률 唐律≫ 등이었는데, 대개는 ≪통감≫ 정도에서 그쳤다. 조선시대 중엽 이후로는 우리 나라의 독자적인 동몽교재의 개발과 보급이 서당에서 교육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제술로는 오언절구·칠언절구·사율·고풍(古風)·십팔구시 및 작문 등이 있었는데, 훈장의 자질에 따라 제술이 전혀 제외된 곳도 있었다. 습자는 해서를 위주로 하였으나 학습 정도의 진전에 따라 행(行)·초(草)체를 익히기도 하였는데, 이는 뒷날 편지글[禮體]을 익히려는 실용적인 의도에서이다.
서당의 교수방법은 강(講)이 주된 것이었다. ‘강’이란 이미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그 뜻을 질의응답하는 전통적인 교수방법이다.
강은 대개 순강(旬講)·망강(望講)·월강(月講) 등으로 나누어지지만, 서당에서는 일강(日講)이 위주였다. 강에는 배강(背講)과 면강(面講)이 있다. 배강은 암송낭독이고 면강은 교재를 보면서 읽는 임문강독(臨文講讀)이다.
강을 하고 난 뒤에 전개되는 질의응답은 기계적인 기억에 빠지기 쉬운 함정으로부터 건져주었으며, 또 1 대 1의 대면(對面)학습이기 때문에 능력별 수업이 가능하였고, 교사와의 인격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강을 하는 데는 일정한 절차가 있어서 이를 강의(講儀)라고 하였다. 서당교육에서도 곳에 따라서는 서원의 강의와 같이 백록동규(白鹿洞規)나 향약을 낭독하기도 하고, 사석(師席)에 대한 엄숙한 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당에서는 진퇴에 있어서 정중한 배례와 동접간의 읍례(揖禮:읍을 하는 예의) 정도였던 것 같다. 강은 날마다 학동의 실력에 맞게 범위를 정하여 배우고, 그날의 학습량은 숙독하여 서산(書算)을 놓고 읽은 횟수를 센다. 보통 1회의 독서량은 100독(百讀)이었다.
1일의 독서량을 그 이튿날 배송(背誦)하며 합격한 다음에 새로운 학습으로 나아갔다. 이는 학동의 능력에 따라 서로 달랐으므로 일종의 완전학습의 형태와 같은 것이다.
만일 배송을 하지 못하는 경우 그의 학업성취도가 달성될 때까지 반복시켜 완전히 이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따라서 개인의 능력에 따라 학습진도가 달라지게 마련이었다. 또한 야독(夜讀)을 장려하여 자정이 넘도록 등불 아래서 글을 읽는 소리가 마을에 퍼졌다.
학습교재의 순서는 대개 ≪천자문≫·≪유합 類合≫ 같은 책으로 기초 한문자를 가르치고, 다음에 ≪동몽선습≫ 등으로 글자를 붙여서 소리내어 읽는 방법을 가르쳤다.
글의 뜻[文理]을 깨치는 방법으로는 먼저 구두(句讀)의 문리에서 출발하여 일장(一章)의 문의(文義)로 나아가는 점진적 방법으로 가르쳤으며, 마침내 스승 없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지경으로 이끌도록 하였다.
원래 옛 교육에서의 글공부란, 먼저 글의 뜻을 명백히 하고 응용에 통달할 것이며, 한갓 장구(章句)에 얽매여 문의를 견제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서당교육의 문자학습은 대체로 구두의 문리를 통달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어서 ‘일장의 문의’를 말할 수준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서당교육에서는 계절학습에 관한 것이 특색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즉 계절과 학습의 내용 및 방법을 조화시켰던 것이다.
예컨대, 겨울에는 경사(經史)와 같은 어려운 학과를 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율(詩律)과 같은 흥미본위의 학습을 시행하였으며, 봄·가을에는 사기나 고문과 같은 글을 읽게 하여 선비로서의 뜻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게 하였다.
봄·가을에는 밤이 짧기 때문에 야독이 없는 대신에 사율을 짓게 하였으며, 글을 읽고 난 다음의 오후에는 서예를 익히게 하여 졸음과 게으름을 쫓아버리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하과와 같은 피서교육 또는 계절학습이 있었다. 하과는 원래 고려시대 최충(崔冲)이 설립한 문헌공도(文憲公徒)에서 시작되었다.
그 뒤 십이도(十二徒) 전체가 매년 여름철이면 고요하고 시원한 산방(山房)을 빌려 시회(詩會)도 열고 조촐한 잔치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를 일명 하천도회(夏天都會)라 부르기도 하였다. 서당에서의 하과는 이와 같은 격식은 차리지 않았으나 유사한 유풍이 전승되었다.
계절학습과 함께 서당교육의 방법으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유희학습 또는 여가선용의 학습이라 할 수 있다. 서당의 학동은 연령상으로 보아 한창 놀이를 즐기는 시기이므로 학습보다는 유희나 악희(惡戱)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였다.
서당교육에서는 아동의 이러한 심성을 활용하여 놀이를 통한 학습방법을 시행하였다. 예컨대, 쌍륙(雙陸·雙六)놀이를 이용한 ‘종정도(從政圖)놀이’로서 경외관직명(京外官職名)을 익히도록 하는가 하면, ‘고을 모듬’이라 하여 8도의 각 고을 이름을 외우도록 하였다.
또는 ‘초(初)·중(中)·종(終) 놀이’를 통하여 옛 사람의 시구(詩句) 한 구절을 부름으로써 그 대구(對句)를 찾는 일종의 시공부 놀이를 하기도 하였으며, 조금 정도가 높은 학동들에게는 ‘화승작(火繩作)’이나 ‘각촉부시(刻燭賦詩)’와 같은 글짓기겨룸의 놀이도 하였다. 그리고 이따금 투호(投壺)를 하게 하여 심신의 집중과 한가함을 아울러 맛보게도 하였다.
서당에는 획일적인 규제와 성격규정이 뒤따르지 않았으므로 마을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서 그 용도와 성격이 변화되었다. 서당은 강학소(講學所)로서의 기능은 물론 동리 노소의 공회처(公會處)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향음주례를 주관하는 장소로도 제공되었고, 선조에 대한 제향기능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강학기능 자체도 마을의 특성에 맞추어 교육수준 및 내용을 변화할 수 있어, 초학아동의 문자학습에서부터 고급성리서의 강론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의 차이를 나타내었다.
이는 법률에 의하여 서당이 설립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엄격히 제정된 법규가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당의 개폐는 자유롭고 임의로운 자연발생적 교육시설이었기 때문에 서당은 조선시대 말까지 그 교육활동이 정체됨이 없이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엽 이후 서당을 자연발생적인 형태로 방기할 수 없다는 의견이 고조되었는데, 이는 서당이 비록 사립의 임의로운 교육시설이지만, 그것이 지니는 교육문화적인 의의와 국가문교에 차지하는 비중이 막중하다는 인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몽교육의 중요성을 국가가 장려하려는 문교정책의 전진이었고, 교학행정을 국가가 일관성있게 감독하려는 정책적 전환이기도 하였다.
효종 10년(1659) 제주(祭酒) 송준길이 제정한 <향학지규 鄕學之規>는 그 구체적인 예이다. 한편 지금 여러 문집에 남아 있는 당시 서당의 학규는 대체로 이황(李滉)의 <이산원규 伊山院規> 및 이이(李珥)의 <은병정사학규 隱屛精舍學規>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서당 설립의 주목적이 명인륜(明人倫)에 있으며, 아울러 향촌사회에 상하의 분별을 포함한 예법과 성리학의 전파에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예로 박세채(朴世采)가 제정한 <남계서당학규 南溪書堂學規>에서는 서당의 입학자격을 공부에 뜻이 굳은 자로서 늘 내학(來學)하는 자로 정하되, 가문의 현미(顯微)함은 불문에 붙일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거처에는 반드시 연장자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하고, 10세 이상의 연장자가 출입할 때 소자(少者)는 반드시 일어설 것을 명시하였다. 서당 내에서는 성현의 성리서가 아니면 볼 수 없으며, 언어사용은 반드시 신중하고 예법과 문자에 관한 말이 아니면 말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것은 올바른 선비가 되기 위한 하학(下學)공부가 서당교육의 중요한 목적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조정에서는 서당에 관한 여러 가지 진흥책을 폈으나,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교육내용이 부실하고 형식에 그치게 되었다.
이는 당시 학풍의 쇠퇴를 야기시킨 사회적·경제적 모순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매관매직을 통한 입신영달의 풍조는 교육의 기본적인 질서를 무너뜨리게 하였고, 서당은 문자해독교육의 구실밖에는 다른 교육적인 실효를 거둘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당교육의 정체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선각적인 학자들에 의해서 부단히 검토되었다. 유형원(柳馨遠)·정약용(丁若鏞)·이승희(李承熙) 등이 주장한 교육체제일원화의 구상이 그것이다. 유형원의 학제개혁안은 서당과 서원을 사실상 관학체제에 흡수시킴으로써 당시의 학제를 계열화하고자 한 논의였다.
즉 지방의 서당에서부터 중앙의 최종 교육기관인 태학에 이르기까지를 하나의 조직 속에 편입시키고자 한 논의로, 이는 당시의 교육제도와 과거제도를 유기적인 연관성 아래 통합시키고자 한 것에 주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제시한 서당과 서원의 관학체제로의 편입안은 이들 교육기관의 설립과 유지 및 학장을 관학체제에 흡수하여야 하는 난점이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국가재정과 관료조직의 성격에 비추어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서 현실화되기에는 많은 난점이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서당교육은 19세기 말 근대적 교육의 전개와 더불어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였고, 특히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큰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의 서당은 옛날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재래식서당과 새로운 시대조류에 적응한 개량서당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개량서당은 재래식서당과는 달리 근대교육의 교과를 도입, 설정하고, 교원 또한 근대식 교육을 받은 자들로 구성하였으며 민중교육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통치자들은 서당교육이 민족교육 내지 민족의식을 앙양시키는 온상으로 보아 갖은 탄압책을 실시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1918년에 공포된 <서당규칙>을 들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서당은 그들의 동화교육정책에 대항하는 장소였으며, 근대 학교로의 발전이 가능한 요소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외세의 침탈 때문에 그러한 기회를 상실하지 않을 수 없었던 민중의 마지막 교육기관이기도 하였다.
일제 총독부의 통계에 의하면 1911년 3월 말 현재 서당수는 1만6540개 소이며, 학동수는 14만1604명이었다. 그리고 1918년 8월 총독부가 <서당규칙>에 따라 각 서당이 보고한 것을 수합하여 발표한 ‘서당상황’에 의하면, 당시 서당수는 2만4294개 소, 학동수는 26만4835명이었으나, 1921년 서당수가 2만5482개 소, 학동수가 29만8067명으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1922년을 기점으로 하여 해마다 감소되어 1930년 서당수 1만36개 소에 학동수는 15만892명, 1940년 서당수 4,105개 소에 학동수는 15만8320명으로 되었다. 광복 후 <교육법> 제정에 따라 학제가 정비되면서 점차 소멸되었으며, 서당의 교육기능 역시 학교로 이전되고 현재는 학교교육을 보조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오늘날 서당은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대부분은 서당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초보적인 수준부터 중·고급 수준까지 한자 능력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사설학원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이 곳에서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예와 예절교육을 담당하기도 하며, 방학을 이용한 특별강좌를 운영하기도 한다. 두 번째로는 전통적인 서당 교육방법을 고수하며, 한자로 된 고전을 능숙하게 해독해낼 수 있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서당이 극소수 존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인터넷의 빠른 보급과 확산에 힘입어 사이버 서당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로 기존의 서당이나 한학연수원에서 운영하는 것으로서, 한자인구의 저변 확대라는 점에서 향후 역할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