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회(儒會) 또는 유림공론(儒林公論)이라고도 한다. 당회는 서원뿐 아니라 향교에도 있었으나, 유림공론의 성격상 서원이 중심 거점이 되어 그들의 권익을 대변하였다.
당회의 성격과 결의절차는 매우 민주적인 것이 특징이다. 그 성격은 서원 운영문제에 관한 의결을 비롯하여 정치·사회 문제에 대한 재야 유사들의 여론을 환기하거나 집결시키는 것이었다.
때로는 시국에 관한 문제, 특히 대의명분에 관계되는 일이 사림에 생겼을 때에는 즉시 당회를 열고 통문(通文)을 돌려서 여론의 규합을 꾀하거나 자기 서원의 태도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연명으로 상소를 하여 성토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당회는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당쟁에 가세하는 폐단을 가져오기도 하였고, 이른바 ‘청의(淸議)의 풍(風)’이라는 여론 조작으로 내외 관료를 괴롭히기도 하였다.
또한 지역사회의 풍속을 규찰하는 강력한 힘을 지녀서 이로 인한 공도 컸지만 허물 또한 적지 않았다. 효자·열녀를 표창하며 강상(綱常:三綱과 五常, 즉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난 자를 성토하였는가 하면, 이를 빙자하여 무고한 백성을 잡아다가 토색질을 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사용된 것이 곧 패자(牌子:속칭 牌旨 또는 까막패자[墨牌]라고 함)인데, 서원의 도장을 먹물에 찍어서 보내는 이 패자는 백성을 치죄하는 무서운 신표(信票)가 되었다. 당회에서는 비단 백성에 대하여 뿐 아니라 같은 사류(士類)도 죄과가 있는 자를 규탄하였다.
성균관의 예를 본떠 벌문(罰文)을 써붙이기도 하고 ‘명고출송(鳴鼓出送)’이라 하여 원노(院奴)를 시켜 북을 울리며 서원 밖으로 내몰기도 하였다.
당회에서는 의안(議案)을 완의(完議)라 하고 그 결의사항을 적은 것을 ‘완문(完文)’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엄정한 민주적 합의절차에 따라 이루어졌다. 유원록(遊院錄)에 이름을 올리는 ‘취사(取士)’와, 서원의 서기격인 ‘조사(曹司)’를 선출하는 공사원(公事員:서원의 원로로서 원장과 유신의 선거인)들의 회의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는 당회 절차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1) 취사(取士)
공사원 열 사람이 서원 강당에 개좌(開座)한 뒤, 향중유생 가운데 나이 30세 이상으로 학식과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서 서기격인 조사로 하여금 그 이름을 각기 쓰도록 하고 죽통(竹筒)을 여러 공사원에게 돌린다.
공사원은 열거된 후보자의 이름을 보고 각기 표를 하여 죽통 안에 넣는다. 이를 마치면 죽통을 봉하여 원장에게 나아가 보이고, 준점(準點)과 참방(參榜, 10표면 ‘준’, 5표면 ‘참’)을 가리고 서원의 유생 명단인 유원록에 기재한다.
이와 같은 인선절차를 거쳐 유생은 서원의 모든 의례(儀禮)와 당회에 참여할 자격을 얻게 되는데, 유원록에 이름이 실리는 일을 ‘청금록(靑襟錄)에 오른다.’고 하였다. 이로써 선비는 일상생활에서 항상 몸가짐을 신중히 해야 하였으며, 향풍(鄕風)이 숙정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취사는 과거와 같이 자(子)·오(午)·묘(卯)·유(酉)년에 해당하는 식년에 한 번씩 하였고, 인원은 15인에서 20인 가량이었으나 수시로 가감이 있었다. 취사되어 유원록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원중재임(院中齋任)을 맡지 못하였지만, 50세 이상으로 서원 일에 간여해야 할 유생이 생겼을 경우, 취사 절차를 거치지 않고 유원록에 이름을 직서(直書)하는 경우도 있었다.
(2) 조사(曹司)
공사원들이 개좌하여, 먼저 나이가 젊고 행실이 바른 선비 한 사람을 조사로 호천(呼薦)하여 선출하고, 그 이름을 쓴 뒤 죽통을 돌린다. 모든 공사원이 그 통을 돌려가면서 표를 하고 난 뒤,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으면 선출된다.
만약 3분의 2에 이르지 못하면 공사원은 다른 사람을 추천해야 하고, 이렇게 세 번 네 번 추천하더라도 ‘준(準)’에 이르러야만 조사가 될 수 있었다. 서기격인 한 사람의 조사를 선출할 때도 이렇게 신중하였으며, 조사를 호천하는 추천인은 그 사람의 이력을 좌중에 고하도록 하였다.
서원 인사를 다루는 공사원은 대개 원임(原任)의 유사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추복(推服:추앙하여 복종함)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는데, 일종의 원로원회의와 같은 성격을 지녔다.
공사원이 임기중 중제(重制)의 상(喪)을 당하면 회의를 열고 결원을 보충하였으며, 3분의 2 이상 출석,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의결하였다. 그러나 정수가 안 되어 개좌할 수 없으나 부득이한 일이 생겨 시일을 넘기지 못할 경우, 시임(時任)의 유사를 임시로 보참(補參)시켜 개좌하는 편법도 가능하였다.
그러나 공사원이 되고 나서 회기에 한 번 결석하면 따지고[問之], 두 번 결석하면 꾸짖고[責之], 세 번 결석하면 벌을 주는[罰之] 제도가 있으므로 공사원 개좌제도는 무리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회의가 끝나면 도사령(都司令:하인 또는 노복)이 “파좌(罷座) 아뢰오.”를 세 번 연창하고 회의를 마친다.
(3) 규 정
당회에 관한 규정은 매우 평면적인 내규에 지나지 않지만 수백 년을 내려온 불문율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유림공론은 사림의 여론발의(輿論發議)이기 때문에 유학정신의 실천과 행동원리인 의리에 입각해야 하였고, 이러한 의리의 정신은 사리의 경위를 분명히 하는 시시비비에 있었으므로 선비들은 오로지 ‘의리의 법정’에서 선왕(先王)의 도를 밝히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심의 판결이 정경대도(正經大道)의 보편성으로 나타날 때 척사위정운동이나 의병초모격문(義兵招募檄文) 등의 형태를 띠기도 하였으나, 향당(鄕黨)이나 색목(色目:사색당파의 파벌)의 이해로 표시될 때는 붕당 성격을 남기게 되었다.
당회는 향풍을 어지럽히는 자에게 향약에 의한 처벌을 집행하는 간이재판소 구실도 하였고, 역기능으로 백성을 경제적으로 수탈하는 무서운 ‘까막패자’가 되기도 하였다. 유생들이 서원에 모여드는 까닭은 한가롭고 고요한 곳을 찾아 덕을 닦고 어짐을 구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유생들은 차차 이러한 높은 뜻을 저버리게 되고, 드디어 후기의 서원은 민중의 원부(怨府)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따금 서원 유생들은 당회를 통하여 중앙정계의 붕당이나 권신들과도 표리상응하여 ‘청의(淸議)’라고 하는 일종의 정치여론을 조작, 때로는 국정을 비방하기도 하고 당쟁에 뛰어들어 암투와 살벌을 조장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