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출신이나 가계는 알 수 없으나, 선덕여왕대(632∼646년)에서 문무왕대(661∼680년)에 걸쳐 활동한 인물로 추정된다. 그가 살던 절을 석장사(錫杖寺)라 한 것은 석장(錫杖 : 중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 끝에 포대를 달아 두면 지팡이가 스스로 단월(檀越 : 施主)의 집으로 날아가서 재 지낼 비용을 거두어 다시 본래의 장소로 돌아왔다 하여 얻어진 이름이라 한다.
그는 여러 가지 예술에 능통하여 신기에 가까운 기예는 비길 데가 없다고 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나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쓰기도 하였다. 조각 작품은 주로 소조(塑造 : 진흙으로 만듦)에 능통하였다. 그가 만든 작품으로는 영묘사의 장륙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 그리고 전탑(殿塔)의 기와를 비롯하여 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신장상, 법림사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이 유명하다.
또한 그가 살던 석장사에는 벽돌로써 작은 탑을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을 새겨서 봉안하였다고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에 현존하고 있는 석장사터는 최근 발굴 결과 『삼국유사』에 기록된 바와 같은 삼천불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벽돌에 불상과 탑을 새긴 수많은 조각상이 확인됨으로써 양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의 활동 무대는 주로 경주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절터에서 수습된 각종 조각 작품의 유형은 서역적 요소까지 보이고 있어 그의 예술 세계는 매우 깊고 광범위한 지역에까지 수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그는 당시 신라 도성에 있어서 폭넓은 교화력을 지닌 고승으로 추앙되었다.
즉, 그가 영묘사의 장륙삼존상을 만들 때는 성중의 남녀가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고 한다. 이때 그가 지어 부르게 한 노래는 「풍요(風謠)」라 하여 『삼국유사』에 전래된다. 이 「풍요」는 혼자 노동할 때 고됨을 덜기 위하여 부르는 노동요라고 하나, 불상을 만드는 데 소요되는 진흙의 분량을 생각하더라도 이를 노동요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래의 성격으로 보아 오히려 공덕가(功德歌)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삼존상을 만들 때는 스스로 선정(禪定)에 들어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떠오른 부처의 모양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그러므로 성중의 남녀가 더욱 그를 따랐고, 또한 공덕을 닦기 위하여 모여든 것으로 짐작된다. 일연(一然)은 양지를 평하여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하나 대방(大方 : 문장이나 학술이 뛰어난 사람)으로서 하찮은 말기(末技 : 변변치 못한 기술이나 재주)에 자취를 감추고 지낸 자라고 하였다.
따라서 양지는 대방의 고덕(古德 : 덕이 높은 중)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말기에 가려서 고승으로서보다는 한 사람의 장승(匠僧)으로서 더욱 알려졌다. 그러나 양지의 참모습은 잡예(雜藝)와 같은 말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덕이 충만한, 즉 성중의 남녀가 다투어 추종하였던 수행자로서의 높은 정신적 차원에 있다.
또한 고덕의 승려임과 동시에 재예(才藝)를 겸비한 뛰어난 장승이었다. 특히 그의 작품으로 추정된 석장사지에서 수습된 「연기법송명탑상문전(緣起法頌銘塔像文塼)」은 7세기 후반 인도의 남해 지역을 여행한 당나라 의정(義淨)의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도 기록된 바와 같은 인도에서의 건탑에 따른 법사리(法舍利) 장엄 법식을 바로 신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이 작품을 양지의 것이라고 한다면, 양지는 그가 활동하던 시기인 7세기경에 이미 인도의 문화적 배경을 수용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석장사지에서 발굴된 소조 불상의 조각 양식이 인도 간다라 지방 불탑의 부조상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또한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석장사지 출토의 고행상(苦行像) 벽돌 조각 역시 서방적 불상 조각 양식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양지는 젊은 시절 적어도 인도를 여행하였거나 아니면 그 지방의 문화적 배경에 매우 밝았던 사람으로 평가된다. 현재까지 발견된 경주 사천왕사지의 사천왕소조상 또는 최근 수습된 석장사지의 조각상들은 그 조형 양식에 있어서 서역적 색채를 짙게 풍긴다. 뿐만 아니라 매우 사실적이고 자신에 넘친 조각 수법이었음을 감안할 때 바로 양지와 같은 명장의 솜씨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