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목탑 건립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3)에 불교 수용과 함께 창건된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 평양 지역의 구사(九寺)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는 평양의 낙랑 유적과 고구려 고분벽화 등을 통해 수준 높은 건축 기술을 보유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기에, 이들 사찰에도 목조건축 양식의 불탑이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삼국유사』의 「탑상조(塔像條)」에는 “고구려 성왕(聖王)이 요동성(遼東城)에 무너진 삼중 토탑(三重土塔)을 발견하고 이곳에서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후 7층 목탑을 건립(起木塔七重)”했다고 한다. 후에 높이를 낮추려고 하다가 목탑이 썩어 무너졌다고 한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고구려가 7층 이상의 목조건축을 건립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 조사된 가장 이른 사례는 498년(문자명왕 7)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강사지(金剛寺址)의 평면 8각 목탑지(木塔址)이다. 금강사는 평양 청암동에서 조사된 절터와 위치가 같아 청암동(리) 사지로도 불린다.
청암리성(靑巖里城) 안에 있는 사지는 1938년 배수구 정비 작업 도중 고구려 기와층 노출을 계기로 조선고적연구회(朝鮮古蹟硏究會)의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에 의해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고이즈미는 1934년 평양 박물관 관장에 취임한 인물로 청암리 사지와 원오리 사지 등 고구려 유적 조사에 깊게 간여했던 인물이다. 요네다는 1938년 출간된 『불국사와 석굴암』에 실린 각종 실측도를 작성하였으며, 경주 망덕사지, 사천왕사지 발굴과 천군리(千軍里) 사지 석탑 보수 후, 청암리 사지 발굴 조사 책임자로 참가했다.
국내에 알려진 청암리 사지의 평면도 역시 요네다의 작성으로 추정되며, 특히 일본 아스카[飛鳥] 시대 사원 건축과의 관계에 주목했다. 요네다는 일제강점기 고구려 지역 사지를 비롯해 탑 관련 조사를 주도했는데, 1942년 경성에서 사망 후 교토 대학교의 무라타 지로[村田次郞]가 요네다의 연구 성과를 모아 『조선상대건축의 연구(朝鮮上代建築の硏究)』 단행본을 출판하였다.
청암동 사지는 8각 목탑지(木塔址)를 중심으로 남쪽 중문지(中門址)를 제외한 3면에 금당을 갖춘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 가람 배치를 갖추고 있다. 목탑지 기단 한 변의 길이는 10.2~10.4m, 둘레에는 0.7m 너비로 둥근 돌을 깔아 탑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를 개설하였다. 가람(伽藍) 중앙에 불탑을 배치하는 형식은 중국 수대(隋代)부터 시작되었는데 불탑을 중심으로 사방에 회랑을 두르는 형식과 불탑을 중심으로 소형의 불탑을 배치하는 형식으로 세분된다. 회랑을 돌린 형식은 중국 대동(大同) 방산사지(方山寺址)를 들 수 있는데, 중국 초기 제사 건축과 매우 유사하다. 중앙 명당을 중심으로 주위에 회랑을 둘러 방형 공간을 구성하며 사방에 문을 낸 형식이다.
따라서 당시 고구려는 청암동 사지 목탑을 통해 수당(隋唐)의 발전된 목조건축 양식과 대등한 수준의 건축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목탑은 특히 도성과 가까운 곳에 건립하였는데, 금강사 이외 정릉사지(定陵寺址), 상오리 사지(上五里寺址), 토성리 사지(土城里寺址) 등이다. 특히 토성리 사지는 황해북도 봉산군 토성리에 있는데, 고구려 유적 중 가장 최근에 알려진 유적으로 1987년 간행된 보고서를 통해 팔각탑지(八角塔址)를 중심으로 중금당지(中金堂址)와 서금당지(西金堂址)가 발견되었다.
백제는 『당서(唐書)』의 「백제조(百濟條)」에 "승니사탑심다(僧尼寺塔甚多)"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찰과 불탑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한성과 웅진 시기까지는 불교 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사비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인 불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사비 지역에서만 37개소의 사찰 터가 확인되었으며, 부여 군수리 사지, 금강사지, 왕흥사지와 익산 제석사지, 미륵사지 중원 탑지 등에서는 평면 방형의 목탑지가 조사됐다.
군수리 사지는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축선 상에 배치된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 가람으로 조사됐는데, 탑지 주변에서 방형의 기둥 자리와 중앙에서 대형 심초석(心礎石)이 발견되었다. 금강사지는 일탑식 가람으로 탑지 중앙에서 심주(心柱)를 세웠던 심초 구멍이 발견됐다. 미륵사지 중원 목탑지에서는 기와와 기초를 형성하기 위한 판축층이 조사되어 목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제에서 사비시대까지 목탑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를 통한 건축 기술의 유입 덕분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3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서도 중국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고구려와 중국의 남북조 문화가 사비 도성에 빠르게 유입되었을 것이며, 사비 도성을 축조할 수 있었던 장인 집단과 결합함으로써 다수의 목탑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목탑과 같이 고층의 대형 건축물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지상부 구조물에 앞서 기초에 해당하는 대지와 기단 구축이 선행되어야 한다.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지 조성은 대부분 성토(盛土) 다짐하였는데, 높낮이 차이가 있는 경우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경사지게 성토했다. 능산리 사지 목탑지에서는 경사면 성토와 수평 성토를 함께 사용했다. 기단 토는 모두 판축으로 다짐했는데, 한성 시기부터 사용된 축조법을 이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심초석은 심주를 받치는 초석이면서, 사리를 봉안하는 장소다. 심주는 불탑의 중앙에 위치하면서 지상에 축조한 여러 층의 목조 구조물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심초석 형태는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상면만 정교하게 다듬고 나머지 부분은 간단한 치석으로 마무리했다. 심초석을 설치한 후 심주를 세우게 되는데, 현재까지 능산리 사지 탑지에서만 심주가 심초석 북편에 치우쳐 확인되었다. 군수리 사지에서는 상면에 노출된 철편을 통해 심주를 드잡이했을 가능성이 있고, 왕흥사지 심초석 상면에서는 토적심(土積心)이 확인되었다. 특히 군수리 사지와 왕흥사지에서는 심주를 세우기 위한 경사로가 확인되었다.
백제의 목탑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 중 주목되는 것은 국립부여박물관 소장의 금동탑편(金銅塔片)인데, 하앙식(下昻式) 공포를 표현했다.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 없이 살미첨차(山彌檐遮)가 끼워져 있다. 첨차의 짧은 방향으로는 소로를 올려 하앙을 받쳤고, 다시 그 위의 외목도리를 직접 받도록 했다. 금동탑편에 사용된 하앙 구조는 하앙, 출량, 출공으로 이루어지는 초기 하앙 기법으로서 단하앙을 이용하여 이출목으로 나가는 기법으로 추정되며, 일본 법륭사(法隆寺) 금당의 하앙 구조와도 유사한 형식이다. 지붕은 사모지붕 형태로 하앙을 이용해 처마를 효과적으로 내밀기 표현했는데, 지붕의 하중이 역학적으로 안정된 구조물을 축조할 수 있는 기법이다.
신라의 목탑으로는 선덕왕 때 자장 스님의 건의로 건립된 황룡사 구층목탑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특히 백제 장인 아비지(阿非知)의 지휘로 탑이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는데, 백제 건축 기술의 신라 유입을 보여 주는 사례로 이 탑을 통해 백제의 발전된 건축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 목탑은 현재 약 10기 정도 건립 사례를 확인할 수 있는데, 6세기 말7세기 초 흥륜사 목탑, 천주사 오층목탑, 영묘사 목탑이 건립되다. 7세기 중엽8세기 기간 중 황룡사 구층목탑을 비롯해 사천왕사 목탑, 망덕사 십삼층목탑이 세워졌다. 9세기에도 보문사 목탑 등을 만든 것같이 계속해서 목탑 건립이 이어졌다.
초기 목탑은 심초석이 확인되지 않아 찰주(刹柱)를 지하에 고정한 형식으로 석감(石龕)을 사용해 사리를 봉안하고, 내부에 사람들이 출입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었다. 중기는 고층의 목탑 건립이 유행했는데, 심초석이 지표에 위치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황룡사 목탑지 상면에 남아 있는 심초석 상면에는 원형의 구멍이 남아 있는데, 상면에 찰주를 세워 목탑의 지상 구조물을 지탱했다. 9세기 이후에는 선종 유입과 함께 대규모 불사 감소를 반영하듯 목탑 규모의 축소가 나타난다.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을 심초석으로 사용하여 사리를 봉안하였고, 지상에 찰주를 세우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들 목탑은 모두 기단, 탑신, 옥개, 상륜 등으로 구성했다.
이외에도 목탑은 아니지만 경주 남산 탑곡마애불(塔谷磨崖佛) 북면의 목탑 조각과 남원 실상사(實相寺) 백장암 삼층석탑(百丈庵三層石塔) 등을 통해 신라 목탑의 형식과 세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백장암 삼층석탑은 낮은 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인데 난간과 창문 사이로 표현된 비천, 보살상 등을 통해 당시 목탑의 내부를 출입할 수 있는 구조로 건립되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목탑은 고려에서도 건립되었는데 태조 왕건은 황룡사 구층목탑을 본받아 개경과 서경에 각각 칠층과 구층의 목탑을 건립했다. 만복사지에서도 목탑지가 조사됐고, 고려 말에는 개경 연복사 오층목탑 건립이 발원되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왕조가 바뀌어 조선 태조 때 완공되었다. 1398년(조선 태조 7)에 흥천사에 오층목탑을 건립한 바 있다.
현존하는 목탑으로는 1624년 세워진 보은 법주사 팔상전(八相殿)과 1984년 화재로 소실된 후 복원한 쌍봉사 대웅전이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앞옆면 다섯 칸 규모의 오층목탑으로 건물 내부 중앙에 기단에서 정상부까지 심주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