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2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남북 약 150m, 동서 약 170m의 네모난 구획을 이루었으며, 총면적은 약 7,800평(약 26,000㎡)에 달한다.
금강사의 창건 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출토된 유물이나 가람배치로 보아 백제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보고 있다. 절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지만, 절터에서 출토된 암키와 조각에 ‘金剛寺(금강사)’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으므로 현재의 위치를 금강사지라고 불렀다.
이 폐사지는 1964년과 1965년의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가람의 규모와 배치가 확인되었고, 그 결과 창건 이후 세 차례에 걸친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중수 때마다 당우들이 약간의 이동은 있었으나 큰 변화가 없었음이 밝혀졌다.
가람의 배치는 동향하여 동서선상에 당전(堂殿)이 배치되고 있어 다른 백제시대의 사지들과는 이례적인 배치를 취하고 있다. 건물 기단은 목탑지를 제외하고는 전부가 단층 기단이었으며, 금당지는 지대석 · 면석 · 갑석을 구비하고 네 귀에는 동자주를 세웠다. 또한, 지대석에 연결된 지표면에는 돌아가면서 포석(鋪石)을 깔았는데, 포석이 기단에서 발견된 예로는 최초의 것이다.
금당 규모는 남북의 길이가 약 19.1m, 동서의 길이가 약 13.9m에 달한다. 금당지의 동쪽에 있는 목탑지 중심에는 심초석(心礎石)이 있는데, 가운데에 구멍이 있다. 강당지는 남북의 길이가 약 45.5m, 동서의 길이가 약 19.1m이며, 강당 좌우 측면에는 회랑이 접속되어 있었고, 후면 중앙부에서는 뒤쪽에 위치했던 승방과의 사이를 연결하는 행랑지가 발견되었다.
중문은 탑지 동쪽에 있었고, 중문의 좌우도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유물로는 백제 때의 연화문막새와 서까래끌개를 비롯하여 신라시대 및 고려시대의 암막새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사지 옆에는 우뚝 선 장독바위가 있고 동북쪽 냇가에는 신터리봉이 있다. 장독바위는 금강사에서 장독대로 사용했다고 전하며, 신터리봉은 절을 지을 때 일꾼들이 신에 묻은 흙을 털었는데, 그 흙이 쌓여 이루어진 봉우리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