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2년(애장왕 3)에 창건하여 금당사(金塘寺)라 하였으며,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작은 왕자 범공(梵空)이 중이 되어 이 절에 머물렀다.
고려 중기에 절을 중창하고 법수사로 개칭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폐사가 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전성기에는 구금당(九金堂) · 팔종각(八鐘閣) 등 1,000여칸이 넘는 건물이 있었다 하며, 지금도 곳곳에 석탑 · 당간지주 · 주춧돌 등이 산재되어 있다. 또 부속암자도 100여개에 이르렀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없다.
다만 골짜기에 남아 있는 암자터와 도은암(道恩庵) · 보현암(普賢庵) · 백운암(白雲庵) · 일요암(日曜庵) 등의 암자명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 절에 봉안되어 있던 비로자나불상은 폐사 직후에 뒤쪽 골짜기에 있던 용기사(龍起寺)로 옮겨졌다가, 용기사의 폐사 뒤인 1897년에 범운(梵雲)이 해인사 대적광전(大寂光殿)으로 옮겨 현재 해인사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절 뒤편의 미륵당에 있던 불상은 1967년에 경북대학교로 옮겨졌고, 진등 촌락에 있던 목 없는 석불좌상은 좌대와 함께 백운국민학교로 옮겨졌다. 현재 절터에는 1975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법주사지 삼층석탑과 1975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법수사지 당간지주, 시식대(施食臺) 등이 남아 있다.
이 중 삼층석탑은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시식대는 영혼의 천도식을 마치고 나서 마지막으로 잡귀에게 밥을 주면서 불경을 읽던 곳으로서, 가로 1.5m, 세로 0.9m, 높이 0.8m이며, 윗면 중앙에 직경 30m의 연화문(蓮花紋)이 양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