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삼국시대에 중국의 책문(冊文)제도를 도입하여 자국의 실정에 맞게 재정비한 이래, 조선과 대한제국기를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시행하였다.
책문은 원칙적으로 ‘왕실의 승통(承統)’에 속하는 인물에 대하여 사용하였으며, 피수책자(被授冊者)의 신분에 따라 재질이 구분되었다. 즉 왕비 이상일 경우 옥책, 왕세자 이하일 경우 죽책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일부 예외적인 사례도 보이는데, 1755년 영조 사친 숙빈최씨시책(죽책)이나 1776년 선조의 후궁 인빈김씨시책(죽책) 등이 그러하다. 반면 앞서 고려에서는 승통에 속하지 않는 공주, 궁주, 공, 후 등 왕의 친척에 대한 책봉에도 책문이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승통 내에서도 옥책과 죽책이 혼용된 사례가 잦았다. 금책은 황제국인 대한제국기에 황실의 예를 사용하면서 처음 등장하였다.
책문은 재질에 따라, 옥책(玉冊), 죽책(竹冊), 금책(金冊) 세 종류가 있다. 책문은 문장 제술(製述)─서사(書寫)─회장(繪粧)의 과정을 거치는데, 옥책과 죽책은 절첩의 형태로, 금책은 책처럼 펴고 접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책문의 규모는 문장의 규모에 따르는데, 옥책은 1첩 58간, 1부 218첩(짝수첩), 죽책은 1첩 56간, 1부 210첩(짝수첩)으로 다양한 반면, 금책은 모두 2개의 금편으로 제작되었다.
책문은 내용에 따라서는 봉책(封冊), 존호책(尊號冊), 시책(諡冊), 휘호책(徽號冊), 애책(哀冊), 축책(祝冊) 등으로 구분된다.
봉책은 왕비 · 왕세자 · 왕세자빈 등 왕실의 종통을 이을 인물 또는 그들의 배우자를 책봉할 때 제작되며, 책봉문의 내용은 책봉의 배경, 인물의 인적 사항과 평가(칭송), 책봉 선언문, 당부 사항 등으로 되어 있다. 존호를 올리는 존호책, 시호를 올리는 시책, 휘호를 올리는 휘호책은 각각 호를 올리는 배경, 인물의 인적 사항과 평가, 올리는 호에 대한 설명 등이 주 내용을 이룬다. 초상 때 제작되는 애책은 사자(死者)를 애도하는 문장이며, 축책의 내용은 종묘에 제사 지낼 때 사용되는 제문이다.
책문은 종묘에 봉안되어 국가 차원에서 엄중히 관리되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괄의 난을 거치면서 이전의 책문이 거의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책문은 총 306건으로, 재질별로 옥책 258건, 죽책 41건, 금책 7건이다. 시대별로는 고려시대 1건, 조선시대 253건, 대한제국기 47건, 일제시기 4건, 현대(1966) 1건이다.
가장 이른 시기의 책문은, 1146년(의종 즉위년) 고려 의종이 선왕에게 시호 ‘공효(恭孝)’와 묘호 ‘인종(仁宗)’을 함께 올린 옥책이다. 조선 전기 책문은 1545년(인종 원년) 옥으로 만든 인종시책으로 간 1개만 남아 있다.
내용별로는 봉책 46건(옥책 16, 죽책 23, 금책 7), 존호책 192건(옥책 185, 죽책 7), 시책 58건(옥책 47, 죽책 11), 휘호책 10건(옥책 10)이 있다. 소장처별로는 국립고궁박물관 299건(옥책 257, 죽책 39, 금책 3), 서울역사박물관 3건(금책 3), 국립중앙박물관 2건(금책 1, 옥책 1), 고려대학교 박물관 2건(죽책 2)이 있다.
책문은 내용이 인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보다는 권력층의 정치적 상황과 수수자의 인간 관계를 바탕으로 한 주관적인 평가와 칭송이 위주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저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책문의 가치는 책문의 제작 배경, 수수자의 신분 관계, 왕실 의례의 특수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평가하여야 한다.
책문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한 왕조가 예와 효라는 유교 덕목을 실천하면서 행한 왕실 의례의 산물이며, 동시에 왕실 최고 계층의 신분이나 명예를 직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문서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책문은 형태적으로 당대의 문장가와 명필, 최고 수준의 전문 장인이 협업으로 제작한 화려한 왕실 공예품이기도 하다. 이에 더하여 책문의 제작 과정에서 생산된 탁인본과 다양한 종류의 필사본 또한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책문의 복합적인 성격을 감안할 때 사료적 가치는 물론 오랜 역사를 지닌 중요 유교 문화 유산으로 평가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