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왕 때부터 있었던 사찰이다.『삼국유사』의 천사옥대조(天賜玉帶條)에는 진평왕이 창건하였다고 했지만, 사금갑조(射琴匣條)에는 소지왕 때 이미 궁궐 내에 이 절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는 절터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이 절은 내전(內殿)·내원(內院)·내불당(內佛堂)·내제석궁(內帝釋宮) 등으로도 불렸다.
486년(소지왕 10) 천주사의 분수승[焚修僧:부처님께 향을 올려 기도해주는 승려]이 거문고갑 속에서 비빈(妃嬪)과 간통하다가 소지왕이 쏜 화살에 맞아 죽게 되었고, 이 때문에 국내의 모든 승려들이 형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변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불교 공인 이전에 불교가 신라 사회에 유포되어 있었던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신장이 11척이나 되는 진평왕이 천주사에 행차하여 돌계단을 밟으니 돌 세 개가 한꺼번에 부서졌는데, 왕이 이 돌을 옮기지 말고 뒷사람에게 보이라고 하였다. 이 돌은 신라시대 성중(城中)의 오부동석(五不動石) 중의 하나였다. 그 밖에도 경덕왕이 승려 월명(月明)에게 차와 수정염주를 하사할 때 갑자기 한 동자가 나타나서 이것을 받아 내원(內院)의 탑 속으로 숨어 버렸고, 차와 염주는 남쪽 벽에 그려진 미륵상(彌勒像) 앞에 놓여 있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다. 이 설화에 의하면 천주사에는 목탑(木塔)과 미륵상을 그린 벽화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중창 및 폐사 연대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천주사는 지금의 제석궁(帝釋宮)인데, 사람들이 해마다 뜰에 꽃을 심고 복을 빈다고 한 『동경잡기(東京雜記)』의 기록을 통하여, 『동경잡기(東京雜記)』가 편찬된 17세기까지는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