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 또는 보제사라고도 하였으며, 크다고 하여 대사(大寺) 또는 당사(唐寺)라고도 하였다. 공민왕현릉(玄陵) 앞에 있던 운암사(雲巖寺)도 광통보제사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동명(同名)일 뿐 별개의 것이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1037년(정종 3)에 정종이 행차한 사실이 있음을 보아 그 전대에 이미 절이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연복사라는 이름이 처음 나오는 것은 《고려사》의 충숙왕 즉위년(1313)의 일인데 어떻게 해서 명칭이 변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의하면 이 절은 사액(寺額)을 관도(官道) 남향에 걸었고, 중문에는 신통지문(神通之門)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정전(正殿)은 나한보전(羅漢寶殿)으로서 극히 웅장하여 왕실보다 더하였고, 그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보현보살의 삼존불을 중심에 두고 주위에 500구의 나한상을 배치하였다.
나한전 서쪽에는 높이 200척이 넘는 5층석탑이 있었고, 뒤에는 법당을 배치하였으며, 옆으로는 승려들의 거주처가 있었다고 한다. 1314년 정월 15일 충숙왕은 이 절에 행차하여 2,000개의 등(燈)에 불을 붙였고, 1367년(공민왕 16)과 1368년에는 공민왕이 절에서 문수회(文殊會)를 열었다. 1369년 신돈(辛旽)이 문수회를 주관할 때 공민왕이 행차하여 관람하고 승포(僧布) 5,500필을 하사하였다.
1370년 4월 16일에는 공민왕이 승려 1,400명에게 공양하였으며, 1371년 정월에는 담선회(談禪會)를, 4월에는 문수회를, 1374년에는 다시 담선회를 개설하였다. 공민왕은 재위 당시 이 절의 5층탑을 다시 세우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391년에 공양왕의 명으로 천규(天珪) 등이 공장(工匠)을 모집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중창 경비가 엄청나고 민간에 폐해가 됨을 주장한 배불론자 정도전(鄭道傳)·김자수(金子粹)·유정현(柳廷顯) 등의 극렬한 상소에 의하여 단청 공사만을 남긴 채 중단되었다. 1393년(태조 2) 봄에 태조는 단청을 마친 뒤 탑의 위층에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고 중간에는 대장경을 간직하였으며, 비로자나불의 탱화를 모셨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란을 거치는 동안 폐허가 되었다.
이 절이 특히 주목을 받는 이유는 독특한 가람배치에 있다. 금당(金堂)과 탑은 직선 위에 건립하는 일반적인 배치법과는 달리 동쪽에 금당을, 서쪽에 탑을 세워 나란히 배치하고 있다. 금당과 탑을 동서 또는 서동으로 배치하는 특이한 형태는 일본의 법륭사(法隆寺)·법기사(法起寺)·법한사(法翰寺) 등에 있다. 일본에서는 이와 같은 배치법이 중국이나 한국에는 없는 일본의 득특한 산물이라고 주장해 왔으나 이 연복사지의 경우 동전서탑(東殿西塔)의 유규를 남기고 있어 주목된다.
현존하는 유물로는 중창비와 범종(梵鐘)이 있다. 중창비는 개성 근교 용산(龍山)으로 옮겨졌고, 범종은 개성 남대문의 누각 위에 있다. 비는 1394년에 권근(權近)이 지은 것인데,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龜趺)만 남아 있다. 네 마리의 용이 쌍으로 어우러져서 뒷발로 보주(寶珠)를 받치고 있는데, 마치 무열왕릉의 조각형식을 연상하게 하는 빼어난 작품이다.
범종은 재래의 우리 나라 종과는 조금 형태를 달리하는 것으로, 용·봉황·거북 등이 파도를 넘는 웅건한 모습으로 조각하였다. 또한, 하반부에는 범자(梵字)와 서장문자(西藏文字)의 명문을 남기고 있는데, 범자는 팔부불보살명(八部佛菩薩名)이며, 서장어는 범어에 대한 번역이다. 이 종은 1346년(충목왕 2)원나라의 공장에 의하여 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