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는 패엽사(貝葉寺)의 말사였다. 창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삼국유사』에 923년(태조 6) 입조사(入朝使) 윤질(尹質)이 중국에서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이 절에 모셨다고 한 것으로 보아 창건연대 또한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그 뒤 현종은 1026년(현종 17) 이 절에 행행(行幸: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하는 것)하였고, 1053년(문종 7) 9월에는 왕이 이 절에 이르러 나한재(羅漢齋)를 개설하고 제왕(諸王)과 재추(宰樞) · 시신(侍臣)을 향연하였다. 또한, 1102년(숙종 7) 10월에는 왕이 이 절에 들러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설하였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1334년(충숙왕 복위 3)에 원나라의 마지막 왕인 순제(順帝)가 그의 원찰(願刹)로 중건하였기 때문이다.
순제는 일찍이 서해의 대청도(大靑島)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때 그는 서해의 산천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해주의 북숭산 기슭에 이르렀을 때 나무와 풀이 우거진 속에 이상한 기운이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찾아가 보았더니, 수풀 속에 한 부처님이 있었다. 이에 그는 만약 부처님의 도움을 얻어 환궁등극(還宮登極)할 수만 있다면 마땅히 절을 지어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기도하였다.
그 뒤 그가 환궁등극하고 2년이 지난 어느 날,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서 “어찌 서로 잊을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꿈을 깬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중국의 재력을 기울여 이 절을 중창하였는데, 그 웅장하고 화려하기가 동방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이 역사에는 원나라의 대감 송골아(宋骨兒)가 이끄는 37인의 공장(工匠)이 참여하였고, 고려의 시중 김석견(金石堅)과 밀직부사 이수산(李壽山)이 송골아와 함께 감독하였다.
이 때 이루어졌던 건물은 법당인 보광명전(寶光明殿)을 중심으로 그 앞에 장랑(長廊), 동쪽에는 누(樓)와 재료(齋寮), 북쪽에는 1동의 전우(殿宇)와 그 앞에 석탑(石塔), 서쪽에는 나한전(羅漢殿) 등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이 밖에도 침실과 석경판(石經板)을 봉안한 해장전(海藏殿) · 중문(中門) · 종루(鐘樓) · 양진당(養眞堂) · 영마전(影磨殿)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1335년 8월에는 충숙왕이 이 절에 들러 축수를 하였다.
그리고 이 절은 일찍이 화재를 만난 일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한 과객이 이 절에 머물고 있을 때 누의 남쪽을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처음 절을 지을 때 남산(南山)에 석옹(石瓮)을 묻어 물을 저장함으로써 화재를 막았다. 이제 그 석옹이 기울어져 물이 새고 있으니, 몇 년 지나지 않아 절에 화재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1677년 4월 5일에 화재를 만났다. 이 때의 화재로 전우와 불상 및 승방 등이 모두 탔다.
다음해에 보광전(普光殿) · 설법전(說法殿) · 약사전(藥師殿) · 시왕전(十王殿) · 만세루(萬歲樓) · 승료(僧寮) 등을 중건하고, 다시 27년이 지난 1705년에 이르러 나한전을 세웠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문화유산으로는 1324년(충숙왕 12)에 세워진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2호인 신광사오층탑과,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3호인 신광사무자비(神光寺無字碑)가 있다. 무자비는 글자가 없는 비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