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대청면에 속하는 섬이다. 백령도·소청도·연평도·소연평도 등과 함께 서해 5도의 하나이다. 『고려도경』에는 눈썹을 그리는 검푸른 먹과 같이 푸르고 울창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하였다. ‘푸른 섬’을 한자로 표기하여 포을도(包乙島) 또는 청도(靑島)라고 불렀다. 섬 주위가 모두 암벽이어서 암도(岩島)라고도 한다. 본래 장연군을 거쳐 옹진군에 속해 있었으며, 갑오경장 후에 백령면의 대청리·소청리로 되었다가 광복 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고려 충숙왕 때에 원나라의 발라태자와 도우첩목아를 귀양 보냈다고 한다.
『고려도경』에 "대청서(大靑嶼)는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것이 마치 눈썹을 그리는 검푸른 먹과 같다 하여, 고려인들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한 것에서, 이 섬이 '푸른 섬'으로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지역을 포을도(包乙島)라 하였는데 이는 '푸른 섬'의 우리 음을 한자로 기록한 것이며, 이를 다시 한자화한 것이 청도(靑島)이다. 또 대청도를 암도(岩島)라고 불렀다고도 하는데 이는 대청도의 섬 주위가 모두 암벽이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으로 추정된다.
대청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섬의 남쪽에 위치한 해발고도 343m의 삼각산(三角山)으로, 이를 중심으로 U자 형태로 산지가 뻗어 있다. 평지는 U자 형태로 열려 있는 섬의 북쪽 동내동과 옥죽동 일대에 일부 분포하고 있고 섬의 대부분은 해안선을 따라 해식애로 둘러싸여 있다. 섬의 수계망과 평탄면은 주로 북쪽 방향으로 발달하였다.
섬의 북동단에 위치한 옥죽동에는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매우 큰 편에 속하는 해안사구가 발달해 있고, 사구습지 등 다양한 사구 미지형이 조사되어 학술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다. 옥죽동 해안사구는 주변의 해빈으로부터 공급된 모래가 산기슭에까지 이동되어 퇴적되어 있고, 현재는 주변 일대가 논으로 개간되어 있으나, 과거에는 내륙 깊숙이까지 사구지대를 형성하였다.
사구에 대한 연대측정(OSL) 결과, 깊이 65㎝ 지점의 연대는 34±7년, 깊이 220㎝ 지점의 연대는 37±8년으로 추정되었다. 지난 수 십년 사이에 최소한 220㎝의 모래가 퇴적되었으며, 이 지역에서의 모래 이동 및 퇴적작용이 매우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청도는 본래 장연군을 거쳐 옹진군에 속해 있었으며, 갑오경장 후 한때 대청도 도장(島長)을 배치하기도 하였으나 뒤에 다시 백령면의 대청리 · 소청리로 되었다가 광복 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대청도에는 고려 충숙왕 5년(1318) 원나라에서 발라태자(孛刺太子)를 이곳에 귀양 보냈다가 충숙왕 10년에 소환하고, 그 이듬해 재차 귀양을 보냈다가 소환하였으며, 충숙왕 17년 도우첩목아(陶于帖木兒)를 여기에 귀양 보냈다가 후원년(後元年, 1332)에 소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대청도 내동에는 아직도 그들이 거처하던 집터인 거택기(居宅基)의 유지(遺趾)가 남아 있으며, 깨진 기왓장이 발견되기도 한다.
대청도의 지질은 상부 원생대에 속하는 상원계 직현통과 제4기 해안사구 및 충적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반암은 규암 및 규암질 사암으로 이뤄졌고, 대청도 해식애에서 수직층리 및 습곡구조를 통해 과거 격렬한 지각운동을 경험한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