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나한은 일반적으로 십육나한, 십팔나한, 그리고 오백나한으로 무리를 이루어 신앙화되는데, 그 중 오백나한은 나한의 위력을 가장 극대화시킨 것이다. 오백나한상은 주로 사찰 내 나한전, 응진전, 혹은 영산전 등에 봉안된다.
불교 경전 중 『증일아함경』, 『십송률』, 『불설흥기행경』, 그리고 『법화경』의 「오백제자수기품」 등에 오백나한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그 내용을 바탕으로 중국 오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송대에 가장 성행하였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에 가장 빈번히 제작, 신앙화되었다.
『증일아함경』을 보면‘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가란타 대나무 숲 동산에서 오백의 큰 비구들과 함께 계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법화경』의 「오백제자수기품」에는 부처님이 500명의 나한을 위해 특별히 수기를 남겼고, 불멸 후 1차 결집 때 이들이 모두 모였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오백나한의 이름은 경전에 그 일부만이 기록되어 있어 후대에 체계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두 가지 계보가 존재한다. 중국과 일본은 남송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며 한국은 고려시대부터 사용하던 존명이 지금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다. 오백나한상은 십육나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커서인지 민간 개인보다는 왕실이나 권력층, 혹은 민간 다수의 발원으로 제작된 경우가 많다. 특히 한국에서는 고려시대 외침으로 국가가 어려움에 처해 있거나 가뭄이 심할 때 국가의 주도로 오백나한재가 개설되고 오백나한상의 제작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중국에서는 현재 남송 1178-1188년에 제작된 100폭짜리 오백나한도가 가장 대표적이며 그 외에 오백나한 조각상이 다수 전해진다. 한국은 고려 1235-6년에 제작된 오백나한도와 고려 14세기 후반의 오백나한도, 그리고 영천 은해서 거조암의 오백나한 조각상이 가장 대표적이다.
오백나한은 나한의 위력이 가장 극대화된 개념이며, 현존하는 작품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나한의 성격과 특징이 가장 다양하면서도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특히 고려시대 오백나한도는 발원목적과 도상, 그리고 기법적인 측면에 있어서 동아시아 오백나한도의 전개과정을 밝히는데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