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본산시대에는 귀주사(歸州寺)의 말사였다. 1436년(세종 18)에 창건하여 처음에는 청수암(淸水庵)이라 하였으나, 창건자는 미상이다. 뒤에 정수암(淨水庵)으로 고쳐 불렀으며 1700년(숙종 27)에는 영흥(永興)이 7칸의 육지료(六知寮)를 신축하였다.
그 뒤 1717년에서 1738년(영조 14) 사이에 신원(信元)·법혜(法惠)·정언(淨彦)·담행(曇行) 등이 법당을 신축하고 불상과 불화, 500근의 범종 등을 주조하였고, 옛 건물들을 중수하였으며, 정수사(淨水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1741년에 산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서 절이 무너질 우려가 있었으므로 담행과 신원이 1744년에 산기슭 쪽으로 이건하였다. 그들은 먼저 청풍루와 소향각을 짓고 옛 절에 있던 불상을 이안하였다. 그 뒤 찬압(粲鴨)·영삼(映森)이 시주를 얻어서 승료와 법당을 신축한 뒤 절 이름을 복흥사로 개칭하였다. 1761년에는 명제(明濟)의 노력으로 9층 석탑을 건립하여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또, 1757년에는 부속 암자인 내원암(內院庵)을 창건하였고, 1782년(정조 6)에 개축하였으며, 1815년(순조 15) 4월에 중수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복흥사를 중건한 목수는 경복궁(慶福宮)을 지은 목수였다고 하는데, 공사 중에 오른팔이 잘리자 왼팔로 절을 완공하였다고 한다.
광주학생운동을 전후한 시기에는 이 절의 젊은 승려들이 항일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심한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1929년 가을에는 원인 모를 불이 일어나서 대웅전 전체가 타버렸으며, 9층 석탑의 일부도 열을 받아 탑신이 손상되었고, 순금으로 된 국보급 석가여래좌상도 도난을 당하였다. 광복 이전에 다시 신축하였으나 건축미가 이전의 것에 미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