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결사가 최초로 일어난 것은 중국 동진(東晉) 때의 고승 혜원(慧遠)이 동림사(東林寺)에서 염불왕생을 결사하고 백련사라 함으로써 비롯되었다.
혜원은 처음 123인의 동지와 함께 재회(齋會)를 베풀고 향과 꽃을 올려 일제히 정업을 닦아서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기약하였으며, 20년 동안 산문 밖을 나오지 않고 수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결사운동은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시대에는 정토왕생과 관음신앙 등을 실천하는 각종 결사가 생겼다. 같은 이름의 백련결사는 오대산의 북대(北臺)에서 행하여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대산 백련사는 나한당(羅漢堂)을 짓고 석가여래상과 오백나한상을 안치하여 낮에는 『불보은경(佛報恩經)』과 『열반경』 등을 읽고, 밤에는 열반예참(涅盤禮懺)을 행하였다고 한다.
이 결사에서는 『열반경』이 중시된 듯한데, 중국의 백련사가 『법화경』을 중시하였던 것과는 다르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백련결사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요세(了世)가 1211년(희종 7)에 강진 남해산 옆의 만덕사(萬德寺) 옛터에 80여 칸의 가람을 짓고 백련사를 만든 것을 말한다.
이 백련결사는 지눌(知訥)의 정혜결사(定慧結社) 못지않게 성황을 이루었는데, 요세 당시에 득도(得度)한 제자가 38인, 백련사에 참여한 사찰이 5개 소, 결사에 직접 참여한 인원이 3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 백련결사에서는 참회하여 죄를 멸하는 참회멸죄(懺悔滅罪)와 정토에 태어날 것을 바라는 정토구생(淨土求生)에 전념하였다. 백련사의 제1세인 요세는 원묘국사(圓妙國師)가 되었으며, 백련사의 법통은 제2세 정명국사(靜明國師), 제4세 진정국사(眞靜國師) 등, 제11세 무외국통(無畏國統)에 이르기까지 전승되었다. 모두가 국사 또는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은 것으로 보아 그 교세가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가 있다.
또 하나의 백련사 결사는 경상북도 상주 사불산(四佛山)에서 있었다. 원래 이곳에는 신라 진평왕이 행차하여 절을 세운 미면사(未麵寺)가 있었으나, 그 규모가 극히 작았다. 1242년(고종 29)에 이 절에 왔던 최자(崔滋)는 절을 중창하고 백련사의 결사를 이룰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백련사가 만덕산 백련사와 혼동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호남공덕산동백련사(湖南功德山東白蓮寺)’라고 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수행이 어떠하였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변(智辨)이 조선시대의 광해군 때 덕유산 구천동에 세운 백련사(白蓮寺)도 창건 당시에는 결사를 뜻하는 백련사(白蓮社)로 명명되어 있었다고 하나 자세한 내용은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