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 후기, 백련결사를 개창한 천태종 승려.
가계 및 인적사항
주요 활동과 사상
1208년(희종 4) 월생산(月生山, 월출산)의 약사난야(藥師蘭若)에서 천태의 관법을 수행하며 묘종초(妙宗鈔)를 강의하다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대중들과 함께 참회수행을 하였다. 이 무렵 탐진현(耽津縣, 현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최표(崔彪), 최홍(崔弘), 이인천(李仁闡) 등이 요세를 찾아와 강진 만덕산(萬德山)에 있는 절터로 와서 수행할 것을 청했다. 1216년(고종 3) 가을 만덕산에 백련사가 완성되자 요세가 낙성법회를 개설하고 주석하였다.
1228년(고종 15) 개경에서 유학을 공부하던 젊은이들이 출가하여 요세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 중에는 백련사의 2세 사주가 되는 천인(天因)과 4세 사주인 천책(天頙)도 포함되어 있었다. 1232년(고종 19) 음력 4월 8일 요세는 처음으로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결성하였고, 1236년(고종 23)에는 천책에게 「백련결사문(白蓮結社文)」을 짓게 하여 공포하였다. 이렇게 해서 백련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백련결사에는 인근 지역민뿐만 아니라 왕실과 무신정권의 권력자, 고위 관료를 비롯하여 300여 명이 참여하였다.
1240년 최이(崔怡)가 발문을 지은 『계환해묘법연화경(戒環解妙法蓮華經)』의 간행에서 보듯 백련결사는 왕실뿐만 아니라 최씨 무신정권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성장했다. 그러나 백련결사의 성장에서 주목되는 것은 지역민의 참여, 그리고 과거에 합격하거나 국자감에서 공부하던 유학자들이 백련결사로 출가한 일이다.
요세는 당시의 불교가 쇠퇴했음을 비판하며 이러한 문제를 천태종의 수행과 참회를 통해 해결하려 하였고, 이를 위해 교단 밖에서 백련결사를 개창하였다. 천태종 결사인 요세의 백련결사는 정토왕생과 천태지의(天台智顗)의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에 근거한 법화삼매를 중요한 수행법으로 실천하였고, 참회를 통해 아미타불의 정토인 극락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였다. 또한 요세는 법화참을 닦으며 『법화경』 독송을 권했다. 법화참의 강조와 그에 수반된 법화경 신앙은 백련결사의 중요한 특징이다.
요세는 1237년(고종 24) 고종으로부터 선사(禪師)의 승계를 제수받았으며, 1245년(고종 32) 제자인 천인(天因)에게 백련사를 맡기고 입적하였다. 요세의 저술로는 천태지의의 『법화현의(法華玄義)』, 『법화문구(法華文句)』, 『마하지관(摩訶止觀)』의 요점만 정리하여 간추린 『삼대부절요(三大部節要)』가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원전
- 『동문선(東文選)』
단행본
- 최동순, 『원묘 요세의 백련결사 연구』(정우서적, 2014)
- 채상식, 『고려후기불교사연구』(일조각, 1991)
논문
- 박용진, 「고려후기 백련사 결사불교의 교학과 실천」(『남도문화연구』 40,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2020)
- 강호선, 「고려후기 백련결사에 대한 재검토」(『불교학연구』 58, 불교학연구회, 2019)
- 오지연, 「백련결사 보현도량의 의미에 관한 고찰」(『불교학연구』 33, 불교학연구회, 2012)
- 고익진, 「원묘요세의 백련결사와 그 사상적 동기」(『불교학보』 15,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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