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우는 조선전기 봉은사 주지, 판선종사도대선사, 선종판사 등을 역임한 승려이다. 1509년(중종 4)에 태어나 1565년(명종 20)에 사망했다. 유학자들과도 깊이 사귀었고 재상 정만종과의 교유를 통해 문정대비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선교일체론을 주창했고 일정성을 정리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기도 했다. 선교양종을 부활시키고 도첩제와 승과를 다시 실시했다. 1565년 4월에 회암사 중창사업을 마치고 낙성식을 겸한 무차대회를 열었지만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제주목사 변협에 의하여 죽음을 당했다.
15세에 금강산 마하연암(摩訶衍庵)으로 출가한 뒤, 금강산 일대의 장안사(長安寺), 표훈사(表訓寺) 등에서 6년 동안 정진하면서 대장경과 『주역』을 공부하였다. 경기도 용문사(龍門寺)의 지행(智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유학자들과도 깊이 사귀었다. 특히 재상 정만종(鄭萬鍾)과의 교유에 의해 문정대비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548년(명종 3)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임명받아 취임한 뒤, 문정대비로 하여금 능침(陵寢)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린 황언징(黃彦澄)을 처벌하고 전국 사찰에 잡인의 출입을 금하는 방을 붙이도록 하였다.
1550년 12월 문정대비가 선교(禪敎) 양종을 다시 부활시키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림으로써, 1551년 5월 선종과 교종이 다시 부활되었다. 같은 해 6월 봉은사(奉恩寺)가 선종의 본사(本寺)로, 봉선사(奉先寺)가 교종의 본사로 지정되었고 그는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1월 승려 도첩을 주는 도승시(度僧試)가 실시되었고, 1552년 4월에는 승려 과거시험인 승과가 다시 열렸다.
1555년 9월 각종 제도적 장치의 결과로 종단이 안정된 기반을 갖게 되자 판사직과 봉은사 주지직을 사양하고, 춘천의 청평사(淸平寺)에 머물렀다. 1560년에 다시 선종판사와 봉은사 주지 직책을 맡았으나, 운부사(雲浮寺)에서 왕자의 태봉(胎峯)이 있는 산의 나무를 베어 사원을 증축한 일에 연루되어 판사직을 박탈당하고 봉은사를 물러나 세심정(洗心亭)에 머물렀다. 같은 해 12월 다시 선종판사로 임명되어 봉은사에 머물렀다.
1565년 4월에 회암사(檜巖寺) 중창사업을 마치고 낙성식을 겸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개설하였지만, 같은 달 문정대비가 죽자 한계산 설악사(雪岳寺)에 은거하였다. 이이(李珥)가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려 그를 귀양 보낼 것을 주장함에 따라 1565년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보우는 선교일체론(禪敎一體論)을 주창하여 선과 교를 다른 것으로 보고 있던 당시의 불교관을 바로잡았고, 일정설(一正說)을 정리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저서로는 『허응당집(虛應堂集)』 3권, 『나암잡저(懶庵雜著)』 1권, 『수월도량공화불사여환빈주몽중문답(水月道場空花佛事如幻賓主夢中問答)』 1권, 『권념요록(勸念要錄)』 1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