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경기도 양주시 천보산(天寶山)에 있는 고려후기 승려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를 본떠 건립한 사찰. 사찰터.
내용
그러나 지공이 창건하기 전에도 1174년(명종 4)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온 적이 있으며, 보우(普愚)가 1313년(충선왕 5)에 회암사에서 광지(廣智)에게 출가한 바 있어 이미 12세기에 존재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주는 알 수 없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의 승려 수는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절로, 조선의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수도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효령대군(孝寧大君)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1424년(세종 6)의 기록을 보면 이 절에는 250명의 승려가 있었고, 경내가 1만여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1472년(성종 3)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정현조(鄭顯祖)에게 명하여 중창하였으며,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 재흥정책을 펼 때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왕후가 죽고 유신(儒臣)들에 의해 나라의 정책이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1565년(명종 20) 사월 초파일에 보우(普雨)가 잡혀 가고 절은 불태워짐으로써 폐허화되었다.
1821년(순조 21) 지공 · 나옹 · 무학의 부도와 탑비가 고의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정에서 1828년에 다시 중수하였으며, 옛터 옆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는 사호를 계승하였다. 1922년에 봉선사 주지 홍월초(洪月初)가 새로 보전을 짓고 불상을 봉안했으며 지공 · 나옹 · 무학의 진영을 모셨다.
1976년에는 호선(昊禪)이 큰 법당과 삼성각 · 영성각(影聖閣) 등을 중건하였다. 회암사의 정문이었던 일주문(一柱門)으로 들어서면 대웅전이 있었던 곳으로, 주춧돌의 수가 532개나 된다.
이 법당터 옆에는 사찰의 화장실 자리가 있고, 오른편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석물(石物)이 남아 있는데, 길이 12자, 너비 9자, 두께 1자, 깊이 3자이며, 이 옆에는 역시 화강암으로 만든 맷돌과 기름틀이 있다. 또한 본당 뒤에는 사방 6자의 떡안반이 있다.
이 사지는 현재 서울의 중앙여자고등학교 소유로서 안내판만 있을 뿐이고, 여기서 500m쯤 올라가서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 현재의 회암사가 있다.
국가지정문화유산으로는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1963년 지정)와 회암사지 무학대사탑(보물, 1963년 지정),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보물, 1963년 지정)이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는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무학대사비가 있다.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무학대사비는 1974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회암사지 사리탑은 1974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보물로 승격 지정되었다.
옛 절터는 196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00년 대규모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동문선(東文選)』
- 『전통사찰총서』 5(사찰문화연구원, 1995)
- 『한국사찰전서』(권상로 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
- [대한불교조계종 〈회암사〉 공식 홈페이지(http://www.hoeamsa.or.kr/)](http://www.hoeams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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