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사는 북한 강원도 회양군 금강산 장경봉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의 승려 혜령이 창건한 사찰이다.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과, 551년(양원왕 7) 고구려의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왕명으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 절은 입구에서부터 일주문, 운성문, 만천교라는 징검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면 숲 사이로 만수정이 있고, 그 안에 ‘금강산장안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945년 이전까지 6전, 7각, 1문을 가졌다. 부속 암자로 장경암, 안양암, 지장암, 영원암 등을 가진 금강산 4대 사찰 중의 하나이다.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과, 551년(양원왕 7) 고구려의 승려 혜량(惠亮)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왕명으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때 비로전을 짓고 비로자나철불(鐵佛)을 봉안했으며, 대장경을 절에 보관했고 오층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 뒤 773년(혜공왕 9)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중수하였고, 946년(정종 1)에 왕의 태후 신명왕후(神明王后)와 황보왕후(皇甫王后)가 각각 『금강경』과 『법화경』을 금니로 사경(寫經)해서 비로전에 봉안하였다. 970년(광종 21) 화재로 불타 버린 뒤 12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982년(성종 2) 선사 회정(懷正)이 함열현 등에서 토지 1,050결(結)을 보시받아 중건하였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 기씨(奇氏)는 고려인으로서, 황제와 태자를 위해 금 1,000정(錠)과 공인들을 보내서 굉변(宏卞)의 감독 아래 퇴락한 당우를 중건하고 새로운 누각을 건립하게 했는데, 지극한 정성과 뛰어난 솜씨는 금강산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작품이었다고 한다.
1392년(공양왕 4)에는 홍예교(虹霓橋)와 절의 사적비가 큰 비로 무너졌다. 1459년(세조 5) 세조가 행차하여 대웅전을 중수하게 하고 토지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1477년(성종 8) 화재로 전소됨에 따라 1483년 나라에서 금 3,000관과 백미 500석을 받아 일청(一淸)이 중건하였다.
1537년(중종 32) 다시 불타 버리자 1545년(인종 1) 일청이 다시 중건하였다. 그 뒤 1708년(숙종 34) 귀옥(歸玉)이 무게 3,000근의 대종을 조성하였다. 1728년(영조 4) 묘현(玅玄)이 중창하였고, 1791년(정조 15) 순상(巡相) 윤사국(尹師國)이 전(錢) 5,000관을 내어 중수하였다.
1842년(헌종 8) 부원군 조만영(趙萬永)이 금 2,500관을 보시하여 새로 300여 칸을 증축하고, 밭 40여 석을 시주하였다. 1863년(철종 14) 호조판서 김병기(金炳冀)가 주상하여 공명첩(空名帖) 500장을 내리게 하고, 자신의 재산 중 1,200냥을 보시하여 중수하게 하였다.
김병기는 1864년에도 3,000냥을 시주해서 불상 · 불화들을 보수하거나 새로 봉안하였다. 이 절은 입구에서부터 일주문(一柱門) · 운성문(雲性門)을 거쳐 만천교(萬川橋)라는 징검다리를 건너면, 숲 사이로 만수정(萬水亭)이 있고 그 안에는 ‘금강산장안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안의 오른쪽으로는 대향각(大香閣), 왼쪽으로는 극락전,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곳에는 본전인 대웅전이 있다. 1945년 이전까지는 6전(殿) · 7각(閣) · 1문(門)을 가졌으나 그 규모는 옛날에 비해 축소된 것이고, 부속 암자로 장경암(長慶庵) · 안양암(安養庵) · 지장암(地藏庵) · 영원암(靈源庵) 등을 가진 금강산 4대 사찰 중의 하나였다.
문화재로는 기황후가 중창할 때 비로자나불을 비롯하여 53불, 1만 5000불 등이 봉안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대법당 왼쪽의 지성전(至聖展)에 봉안된 나한상은 비범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기황후 당시의 것인지 그 후대의 것인지는 단정 짓기 곤란하다.
부속 암자 중 안양암은 장안사 동북쪽 3㎞ 지점에 있는데 고려 성종 때 회정이 창건한 곳이며, 이후 회도(懷道)가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이 암자에는 미륵불과 나한상 등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영원암은 신라 때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창건한 것으로 금강산 일원에서도 가장 맑고 고요한 수도처로 이름 높은 곳이다.
부근의 옥초대(沃焦臺)는 영원조사가 일심으로 수도하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고, 그 앞의 반듯한 돌은 영원조사가 공부하던 곳이라고 하여 책상바위라고 이름 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