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영은 조선 후기에 어영대장, 훈련대장, 영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776년(영조 52)에 태어나 1846년(헌종 12)에 사망했다. 본관은 풍양으로 조엄의 손자이고 조진관의 아들이며 영의정 조인영의 형이다. 딸이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빈으로 책봉되었다. 1827년 안동김씨의 세도를 견제할 목적으로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을 때 풍양 조씨 세도의 기초를 닦았다. 세자가 죽음으로 세력이 위축되었으나 세손의 즉위를 계기로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안동 김씨와의 정권 경쟁에만 급급하여 사회적 모순을 격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음보(蔭補)로 능원랑(陵園郎)을 지내다가 1813년(순조 1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이 된 뒤 지평 · 정언 · 겸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816년 전라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탐관오리들을 다스렸고, 돌아와 전라도 내의 민폐인 진전징세(陳田徵稅) · 환곡허록(還穀虛錄), 각 궁방(宮房)의 횡포 및 각사둔전(各司屯田)의 폐, 어염선세(魚鹽船稅)의 강제 징수 등을 열거, 상소하여 전라감사 김계온(金啓溫)을 파직하게 하였다.
이어 심양사(瀋陽使) 한용구(韓用龜)와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1819년 부사직(副司直)이 되었다. 이 때 그의 딸이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빈(후일의 趙大妃)으로 책봉되었다. 뒤이어 이조참의 · 대사성 · 금위대장을 거쳐 1826년 예조판서 · 이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827년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를 견제할 목적으로, 순조가 건강상 이유를 들어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그는 이조판서로서 어영대장을 겸해 실력자로 부상, 풍양조씨 세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828년 이후 훈련대장직을 겸임하면서 훈련도감 운영비의 조달 방법으로 주전(鑄錢)을 건의하였다.
또 쓸모없이 된 훈국승호포수초상법(訓局陞戶砲手抄上法)의 개혁을 요청, 전국의 각 고을[邑]을 단위로 식년(式年)마다 1인씩의 승호를 뽑아 올리게 하되, 승호된 자가 그 임무를 계속하는 경우에 당해 고을은 다시 뽑지 않고 납전(納錢)하게 함으로써 종래와 같이 무뢰배로 보충하는 폐단을 시정하였다.
1830년 왕세자의 병사로 그 일파는 안동김씨파에 밀려났지만, 그만은 호조판서 · 판의금부사 · 지중추부사 ·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어린 세손의 보호에 힘썼다.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그 외할아버지로서 호위대장(扈衛大將) · 어영대장 · 훈련대장을 역임하면서 불안한 왕실을 보호하는 한편, 자기파인 홍석주(洪奭周)와 이지연(李止淵)을 계속 상위(相位)에 머물게 하며, 동생 조인영과 조카 조병현(趙秉鉉) 등을 이조와 형조판서직에 앉히는 등 세력 만회를 도모하였다.
안동김씨정권의 미온적인 태도로 천주교 교세가 확장되자 이를 안동김씨 세력을 꺾는 호기로 삼아 1839년(헌종 5) 천주교도에 대한 일대 탄압을 전개하며(己亥邪獄) 인영으로 하여금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올려 그 명분을 세우게 했다.
이로써 풍양조씨의 세도를 확립, 이 후 5∼6년 간 정권을 쥐고 그 일족이 현달(顯達)했으며, 그도 1845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영돈녕부사가 되는 영예를 누렸지만, 문중내의 내분과 아들 조병귀(趙秉龜)가 규탄을 받아 갑자기 죽자 실의에 빠진 후, 눈이 멀어 병사하였다.
그는 풍양 조씨 가문의 좌장(座長)이고 핵심 인물로서, 자신은 현직(顯職)을 사양하고 뒤에서 왕세자나 유주(幼主)의 신변 보호와 왕실 안전을 명분으로 각 군영의 대장직을 차례로 역임, 오랫동안 군사권을 장악하여 조씨세도의 군사적 배경을 이루었다.
때문에 그의 실력으로 볼 때, 정치 혁신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안동 김씨와의 정권 경쟁에만 급급, 민생 문제와 사회병 폐를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인 모순을 격화시키고 결과적으로 삼정문란(三政紊亂)을 초래했다는 후세의 비평은 면하지 못할 것이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글씨에 능해 영흥(永興) 궁달리기적비(宮達里紀績碑), 임천(林川) 「회양부사조신묘표(淮陽府使趙愼墓表)」 등이 전해지고 있다. 저서로 『동원인물고(東援人物考)』의 편술이 있고, 시호는 충경(忠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