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조선 후기에 판돈녕부사 · 이조판서 ·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9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이 되어 왜군 토벌과 명나라 군사 접대로 공을 세워 1598년 승지에 발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 · 원손을 수행해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이듬해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에 판돈녕부사 · 이조판서 ·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해 벼슬을 버리고 원주로 거처를 옮겨 화를 피하였다. 인조반정 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기용되었고, 이어 병조 · 예조 · 이조의 판서를 역임했으며,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서 서울을 지켰다. 1630년(인조 8)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고 1632년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나 늙었다는 이유를 들어 바로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 · 원손을 수행해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이듬해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일찍이 외할아버지인 정유길에게서 고문(古文)과 시를 배웠다. 그리고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으로서 황신(黃愼) · 이춘영(李春英) · 이정구(李廷龜) · 오윤겸(吳允謙) · 신흠(申欽) 등과 친밀했으며, 당색이 다른 정경세(鄭經世)와도 도학으로써 사귀었다. 정치적으로 서인에 속하면서 인조 초에 서인이 노서(老西) · 소서(少西)로 갈리자 노서의 영수가 되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서체는 2왕(二王)의 필법을 본뜨고, 전(篆)은 중체(衆體)를 겸하였다. 작품으로는 평양의 숭인전비(崇仁殿碑) 및 풍덕군(豊德郡) 군수 장인정(張麟禎)의 비에 남긴 전액(篆額)이 있다. 시조로는 「오륜가(五倫歌)」 5장,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 9편이 전한다.
한 때 김상용의 죽음을 놓고 스스로 분신한 것이 아니라 실화(失火) 때문이라는 이설도 있었다. 그러나 박동선(朴東善) · 강석기(姜碩期) · 신익성(申翊聖) 등의 변호로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지고, 1758년(영조 3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청음집(淸陰集)』
- 『낙전당집(樂全堂集)』
- 『해동명신전(海東名臣傳)』(김육)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선원유고(仙源遺稿)』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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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진사 급제 : 『만력10년임오2월28일사마방목(萬曆十年壬午二月二十八日司馬榜目)』(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古350.48 사마방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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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문과 급제 : 『국조문과방목』 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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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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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1368년에 주원장이 강남(江南)에서 일어나 원(元)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세운 중국의 통일 왕조. 영락제 때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기고 몽고와 남해에 원정하여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뒤에 북로남왜에 시달리고 환관의 전횡과 당쟁, 농민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 1644년에 이자성(李自成)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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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晉의 王羲之 · 王獻之 父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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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전자체(篆字體)로 쓴 현판이나 비갈(碑碣)의 제액(題額).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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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
: 시호 근거 : 『현종실록』 7권, 1663년(현종 4) 7월 6일. "김상용·김상헌의 서원에 사액을 청하는 양주 유학 이추 등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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