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641년(인조 19)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우의정 김상용(金尙容),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 장령 이시직(李時稷), 돈녕도정 심현(沈誢), 천총(千摠) 구원일(具元一)을 향사(享祀)하기 위하여 강화도 내의 유생과 유수부(留守府)의 재정적인 지원으로 건립되었다.
김상용이 살았던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仙杏里)에 위치해 있으며 1658년(효종 9)에 사액되었다. 건립 때 6인을 제향했으나, 이들과 함께 순절하고도 입향(入享)되지 못한 인물의 후손들의 호소로 1657년에 훈련정 황선신(黃善身), 훈련첨정 강흥업(康興業)을, 1658년에는 금부도사 권순장(權順長), 생원 김익겸(金益謙), 필선 윤전(尹烇)을, 1728년(영조 4)에 좌승지 홍명형(洪命亨)을, 1787년(정조 11)에 광흥수(廣興守) 이돈오(李惇五)를 각각 추향하였다.
1788년에는 척화파로서 순절했던 홍익한(洪翼漢)과 병자호란 때 근왕병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가려다 순절한 윤계(尹棨)를 함께 추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계속해서 추향하다보니 위차(位次)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숙종 연간 이래 조정에서까지 논란을 벌이기도 했는데, 결국 김상용을 주향(主享)으로 하여 동쪽에 이상길 · 홍명형 · 이시직 · 윤계 · 황선신 · 권순장 · 김익겸, 서쪽에 심현 · 홍익한 · 윤전 · 이돈오 · 송시영 · 구원일 · 강흥업의 순으로 각기 배향하게 되었다.
충절인의 넋을 달래고, 또 국가에 대한 충절을 장려한다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강화유수를 통해 국가의 특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서원 · 사우를 훼철할 때에도 그 대상에서 제외되어 존속되었다. 현재는 충렬사유지재단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충렬사동재장의선생안(忠烈祠東齋掌議先生案)」 · 「도유사안(都有司案)」 · 「심원록(尋院錄)」 · 「충렬사사제문(忠烈祠賜祭文)」 등의 문서와 약간의 문집류를 보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