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지역은 강동산줄기, 청룡산줄기 등 산줄기가 뻗어 산지 지형을 이루고, 중심부를 흐르는 대동강과 그 지류들의 연안에는 크고 작은 벌들이 펼쳐져 있다. 시 영역의 적지 않은 지역이 구릉성 벌인 평양벌에 놓여 있다. 구릉성 벌의 해발 높이는 낮은 지역에서 2050m, 높은 지역에서 180220m 정도이다.
해발 높이 200m 이상의 산지는 시 면적의 약 10%이다. 북부와 서부 지역에는 잔구 형태의 산들이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다. 서부에는 만경봉, 용악산, 대성산, 장산 등이 있다. 평양의 한복판을 지나는 대동강의 오른쪽 기슭에는 모란봉을 비롯해 만수대, 장대재, 남산재, 해방산, 창광산 등의 구릉들이 잇달려 있다. 북부에는 봉화산[196m], 추봉산[514m] 등이, 동부에는 풍어산[766m], 고령산[542m] 등이, 남부에는 경수봉[293m], 마장산[309m], 구일봉[69m] 등이 있다.
대동강은 평안남도 대흥군의 낭림산맥에서 시작하여 시의 중심부를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흐른다. 수정천 · 남강 · 무진천 · 곤양강 · 순화강 · 보통강 · 합장강 등의 지류와 합류하여 황해남도 은율군과 평안남도 남포시의 경계를 이루면서 서해로 흘러든다. 북한의 5대 장강이며, 능라도 · 반월도 · 양각도 · 쑥섬 · 두루섬 등의 하중도가 있고, 밀물 때는 사동구역 미림동까지 밀물의 영향을 받는다. 시의 중심부를 지나 대동강으로 흐르는 보통강은 평안남도 평원군 강룡산에서 시작하여 평양시 만경대구역과 평천구역 사이까지 흐른다.
평양시는 온대 계절풍지대에 있어 사계절의 구분이 잘 나타난다. 기후는 서해안 지방과 내륙 산간지대의 중간 정도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2023년 현재 1,163.8㎜이다. 강수량의 계절별 분포에서 최대는 여름철에, 최소는 겨울철에 나타나며, 겨울철에 눈이 적게 내리는 것이 특징이다. 봄철 강수량은 128163㎜, 가을철 강수량은 장마의 영향을 받는 9월 상순을 제외하면 110136㎜로, 각각 연 강수량의 14%, 12%에 지나지 않는다.
연평균 기온은 2023년 현재 12.2℃로 북한의 연평균 기온과 유사하다. 1월 평균기온은 –5.9℃, 8월 평균기온은 24.2℃로서 기온 연교차가 비교적 크다. 서해안 다른 평지대와 마찬가지로 같은 위도상의 동해안 지대에 비해 겨울철 기온이 낮고 여름철 기온은 높은 특징을 보인다. 평양에서 월 평균기온의 연간 편차는 서해안의 평지대나 내륙 지대에 비하여 큰 차이가 없지만, 동해안 지대에 비해 더 크다. 이것은 평양시를 포함한 서해안 지역이 대륙성기후의 특성을 보다 강하게 띠고 있기 때문이다. 역대 최저기온은 –30.2℃[1949년 2월], 역대 최고기온은 37.2℃[1939년 7월]이다. 5℃ 이상 적산온도는 3,154℃이다.
일 평균기온이 0℃ 이상으로 높아지는 시기는 대체로 3월 2일경에 시작되어 5월 8일경에 끝난다. 봄철에는 대륙의 찬 고기압이 현저히 약해지며 상대적으로 고기압 지역에 놓인다. 이로 인해 개인 날씨가 지속되어 일조시간과 태양복사량이 많아진다. 강수량이 적은데다가 대기는 메마르고 바람이 강해 증발량이 강수량의 1.52배에 달한다. 그리하여 45월경에는 토양의 물기가 적어져 가뭄 현상이 종종 나타난다.
이 시기에는 기온이 매우 빠른 속도로 높아질 뿐 아니라 기온 변화가 큰 것이 특징이다. 이때 초기에는 보통 4일에 1℃ 정도 높아져 4월 초순경부터는 같은 위도상의 서해안의 해안지대보다, 4월 하순경부터는 동해안 지대보다 평균기온이 더 높아진다. 이 시기의 기후에서 또 하나의 특징은 낮 기온이 높고 밤 기온이 낮아 일교차가 매우 크다는 점이다.
일 평균기온이 20℃ 이상 되는 시기는 5월 9일경에 시작해 10월 3일경에 끝난다. 이 시기 기후에서 특징적인 것은 기온의 변화가 매우 작고 최저기온이 높은 것이다. 또한 7~8월은 덥고 비가 많이 오는 특징을 보이며, 평균 최저기온은 28℃를 넘는다.
평양에서 일 평균기온이 5℃ 아래로 내려가는 시기는 10월 9일경에 시작된다. 이때부터는 기온이 빨리 내려가고 상대적으로 맑고 메마른 날씨가 계속되며, 기온의 변화가 심하고 일교차가 크다. 겨울철 기온은 동해안 지대보다 훨씬 내려간다. 일 평균기온이 0℃ 아래로 내려갔다가 그 위로 올라가기도 하는데, 보통 그런 시기는 12월 1일경에 시작되어 다음 해 3월 1일경에 끝난다. 이따금 남쪽으로부터 더운 공기가 올라와 몇 시간 사이에 기온이 –5℃ 이상으로 올라가면서 날씨가 따뜻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 지역에는 한반도에 구석기시대가 실재하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지가 있는데, 상원군 흑우리의 검은모루유적이다. 한반도의 구석기문화를 입증하여 주는 유적은 이미 여러 곳에서 발견된 바 있으나, 특히 이곳은 그 시기나 규모 등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약 60만∼40만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는 검은모루유적과 함께 신석기시대의 유적지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1917년에 발굴된 미림리 · 오야리의 유적에 이어 10여 군데의 신석기시대 유적지가 계속 발견되었다. 이처럼 풍부한 선사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고조선시대부터이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과 그 도읍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학계의 정설이 없는 상태이지만, 한나라의 동방 침략 정책에 밀려 멸망한 고조선의 수도가 이곳이었음은 공인되고 있다. 그 뒤 일시적으로 한나라의 동방 군현 세력하에 놓여지기도 하였으나, 압록강 중류에서 흥기한 고구려가 점차 국력을 남으로 확장하면서 군현 세력을 축출하고 313년(미천왕 14)에 이 지역 일대를 차지하였다.
고구려는 이 지역을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하였으며, 334년(고국원왕 4)에 평양성을 견고히 수축하여 남진정책의 근거지로 삼았다. 고구려의 이러한 정책은 북방으로의 진출을 계획했던 백제를 자극하였고, 371년에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격전 끝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얼마 되지 않아 이 지역을 수복하였으며, 광개토왕은 이곳에 영명사(永明寺) 등 9사를 건립하였다. 이어 427년(장수왕 15)에는 평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이후 고구려의 멸망 때까지 240여 년간 수도로 번성하였다. 장수왕 당시의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 동북의 안학궁(安鶴宮)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으나, 그 뒤 552년(양원왕 8)에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장안성(長安城)을 축성하고 586년(평원왕 28) 왕궁을 이곳으로 옮겼다.
7세기에 들어 중국에 통일 왕조가 들어서게 되자 고구려는 계속 그들의 침략을 받았다. 612년(영양왕 23)에 수나라, 661년(보장왕 20)에 당나라의 침공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많은 전과를 올리며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거듭된 외침으로 국력이 손상되었고,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에 의해 668년 평양성이 함락당하며 멸망하였다.
이 지역이 정치적으로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고려 건국 이후의 일이다. 태조 왕건(王建)은 즉위와 함께 황해도 지방민을 이곳에 옮겨 민호를 늘리는 한편, 북진정책의 근거지로 삼고자 왕식렴(王式廉)을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로 삼았다. 또한 서경(西京)으로 고치면서 개경 못지않게 축성하였고, 분사제(分司制)를 실시하여 독립적인 행정 기구를 설치하였다.
따라서 평양의 옛 이름으로 왕검성(王儉城) · 기성(箕城) · 낙랑(樂浪) · 서경(西京) · 호경(鎬京) · 유경(柳京) 등이 있다. 북한은 평양 지명이 옛말인 ‘브루나’[평평한 땅, 벌판의 땅]를 한문으로 옮긴 말이라고 북한은 소개한다.
이곳은 풍수도참설의 뒷받침을 받아 계속해서 역대 제왕이 순주(巡駐)하였으며, 태조나 정종은 평양 천도까지 계획한 바 있다. 995년(성종 14)에 지서경유수(知西京留守)를 두었고, 1062년(문종 16)에는 서경기4도(西京畿四道)를 설치하였으며, 1102년(숙종 7)에 문 · 무반(文武班)과 5부(部)를 별도로 두게 하여 개경과 대등한 제도 · 위치 등을 갖추게 되었다.
13세기에 몽골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평양 지역도 그들의 영향으로 인하여 잦은 시련을 겪게 되었다. 먼저 1216년(고종 3)에는 몽골군에게 쫓긴 거란족이 침입하여 평양을 점령하고 서북 지방에서 노략질을 행하였고, 1231년에는 몽골의 제1차 침입이 시작되며 전화가 미치었다.
이때 홍복원(洪福源) 등이 서경을 점령하고 이곳에 근거를 마련하자, 집권자인 최우(崔瑀)는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 민희(閔曦)를 시켜 이들을 내몰고 이곳 주민들을 해도(海島)로 이주시켰다. 1269년(원종 10)에는 서북면병마사영기관(西北面兵馬使營記官) 최탄(崔坦)이 임연(林衍)을 친다는 구실로 난을 일으켜 서경을 점령하고 몽골에 부용하는 등의 반역 행위를 저질렀다.
고려는 최씨정권이 무너지면서 1270년에 몽골과 강화를 맺었으나, 사실상 원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몽골은 고려안무사(高麗安撫司)를 이곳에 주둔하게 하고,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동녕부는 1290년(충렬왕 16) 고려에 반환되었으며, 공민왕 때 평양부(平壤府)로 개칭되었다. 1359년(공민왕 8)에는 홍건적에게 점령되기도 하였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는 그의 즉위년에 기자묘(箕子墓)에서 단군을 함께 제사 지내도록 함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 뒤 1429년(세종 11)에 단군과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을 함께 모신 숭령전(崇靈殿)을 따로 건립하였고, 기자묘를 숭인전(崇仁殿)으로 부르게 하면서 봄 ·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태조는 1395년(태조 4) 이곳에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를 보내 서북 방면을 관장하게 하였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편 때는 서북면을 평안도(平安道)로 개편하고, 이곳을 평양부라 하여 관찰사를 두어 행정과 군사를 돌보게 하였다. 당시 평안도의 주민은 극히 소수였던 관계로, 세종 · 세조 대에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남부 지방 주민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주면서 평안도 각지로 이주하게 하였다. 이로써 이 지방의 인구는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가 의주로 파천하자, 이를 뒤쫓던 왜군은 7개월 동안이나 이곳을 점령하고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병자호란 때에도 후금(後金)의 점령하에 들어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계속된 외침으로 피폐해진 이곳을 재건하기 위하여 영조는 1733년(영조 9)에 평양성과 도시의 일부를 수축하도록 하는 영을 내렸다. 이 지역은 풍부한 물산과 경승지로 서북 지방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청나라와의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도 계속 늘어나 번성하였다.
평양 지역은 근대에 들어 상업 부문에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것은 이 지역 사람들이 척사적(斥邪的) 성향이 강한 이남 지역에 비하여 서구 문물을 수용하는 데 개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이 지역에서 다수의 개화파 인물이 배출될 수 있었다.
한편, 서양 세력의 군사적 위협에는 강력하게 대항하였는데, 1866년(고종 3)에 발생한 제너럴셔먼호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1894년의 청일전쟁으로 이 지역은 청 · 일군 간의 격전지가 되어 많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1895년에 실시된 23부제에 의하여 평양부로 되었다가, 1896년 13도제 실시로 평안남도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하여 통감 정치가 시작되자, 일제는 이곳에 통감부 이사청(理事廳)을 두었다. 1910년 조선총독부가 식민 통치를 시작하면서 관찰사와 이사관을 폐하고, 도장관(道長官)을 두어 평안남도와 평양을 관장하게 하였다. 그 뒤 1914년에 평양부를 다시 두어 부윤(府尹)으로 하여금 평양부를 통괄하게 하였으며, 이때 종래 시역의 일부와 주변의 읍면을 분리하여 대동군을 신설하였다.
1938년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주변의 면리를 수용하면서 시역을 넓혀나갔다. 광복 이후 1946년 9월 평양부는 평안도에서 분리되어 시로 승격되었고, 1948년 북한 정권 수립 후에 북한의 수도가 되었다.
평안남도 도청 소재지였던 평양시가 1946년 9월 평양특별시로 승격하면서 평안남도에서 분리되었고, 중구역 · 동구역 · 서구역 · 남구역 · 북구역 등 5개 구역으로 행정구역을 구성하였다.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평양직할시가 되었다. 1958년 6월 대성구역을 신설하여 6개 구역이 되었고, 같은 해 9월 중구역 · 외성구역 · 선교구역 · 서성구역 · 사동구역 · 대성구역 · 낙랑구역 · 용성구역 · 만경대구역 · 삼석구역 · 승호구역 등 11개 구역으로 개편되었다.
1960년 10월 평안남도 강동군 일부와 대동군 일부, 순안군[1952년 신설] 일부 지역이 평양시에 편입되었고, 평천구역 · 보통강구역 · 모란봉구역 · 동대원구역 · 대동강구역 · 형제산구역 · 역포구역 등 7개 구역을 신설하여 18개 구역이 되었다.
1963년 5월 평안남도의 강남군 · 중화군 · 상원군[1952년 신설]이 평양시에 편입되었고, 1972년 4월 순안군을 구역으로 개칭하여 19개 구역 3개 군으로 하였다. 1979년 12월 외성구역을 중구역에 통합하였고, 1983년 3월 평안남도 강동군이 평양시에 편입되면서 18개 구역 4개 군으로 편성되었다. 1996년에는 평성시에서 과학연구단지 등 일부 지역을 분리 · 흡수해 은정구역을 신설, 19개 구역 4개 군으로 확대되었다.
2010년에는 강남군, 중화군, 상원군과 승호구역을 평양시에서 분리해 황해북도에 편입시켰다. 하지만 1년 만인 2011년 강남군을 다시 평양에 포함시켰다. 2022년 4월에는 5만 세대 살림집 건설에 따라 기존 용성구역 지역에 화성구역이 신설되었다. 화성구역 신설로 2023년 현재 평양시의 행정구역은 19개 구역 2개 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1980년 당시 인구는 약 184만 2,000명이며, 그중 도시인구가 약 93.5%, 농촌인구가 약 6.5%이다.
1987년 인구는 약 235만 5,000명이며, 인구밀도는 1,178명/㎢이다. 전체 인구 중 도시인구가 약 88.5%, 농촌인구가 11.5%에 이른다. 남녀 성비는 남자가 45.4%, 여성이 54.6%이다.
1993년 인구는 274만 1,260명이며, 그중 도시인구가 85.9%, 농촌인구가 14.1%이다. 남녀 성비는 남성이 47.5%, 여성이 52.5%이다. 연령별로는 10세 미만 인구가 18.7%, 10대 인구가 17.1%, 20대 인구가 18.9%, 30대 인구가 15.2%, 40대 인구가 12.7%, 50대 인구가 10.2%, 60대 이상 인구가 7.2%이다.
2008년에 평양시 인구는 325만 5,288명으로 증가하였다. 그중 도시인구가 80.1%, 농촌인구가 19.9%이다. 남녀 성비는 남자가 47.6%, 여자가 52.4%이다. 연령별로는 10세 미만 인구가 14.9%, 10대 인구가 15.9%, 20대 인구가 14.1%, 30대 인구가 17.2%, 40대 인구가 15.0%, 50대 인구가 9.2%, 60대 이상 인구가 9.2%이다.
이 지역에서는 선사시대의 유물 · 유적이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1966년에 발굴 조사된 상원군 검은모루유적에서는 약 60만∼4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짐승 뼈 화석과 석기류가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청정암동굴에서도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유물이 다수 출토된 바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에 이어 신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은 더욱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곳만 해도 미림리 · 오야동 · 토성동 · 사동 · 석암동 · 청호동 · 반교리 · 서포 · 금탄리 · 입석리 등 10여 군데 이상이 된다. 1959년에 발굴된 미림리유적에서는 상층부에서 즐문토기와 철기가, 하층부에서 무문토기와 석부 · 반율석도 · 방추차 등이 출토됨으로써 이 지역 신석기 문화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고조선의 유적으로는 평천리의 기자정전지(箕子井田址)가 전해지고 있으나, 그 역사성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기원전 1세기∼서기 3세기에 걸친 이 지역 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토성동토성과 정백동 고분군을 들 수 있다.
고구려시대의 고분은 통구를 중심으로 한 압록강 중류 지역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대동강 유역의 고분은 화려한 벽화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용강 · 강서 · 안악 등지의 고분벽화는 회화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활상 등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며, 평양 시내에서도 사신도를 주로 그린 무진리고분 등이 발견되었다.
이곳에 고구려의 왕궁 · 성터가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동천왕 때의 일이다. 이때에 지금의 을밀대(乙密臺)와 만수대(萬壽臺)를 포함한 성벽을 이루고, 대동강변 기린굴(麒麟窟) 부근의 영명사 남쪽에 구제궁(九梯宮)이라는 이궁(離宮)을 이루었다. 일설에 구제궁은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의 왕궁으로, 기린굴은 동명왕이 기린을 사육하던 굴이라고 전하나,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유허만 남아 있다.
이 지역에 있는 대성산성 · 장안성 등은 고구려 성곽의 대표적인 유적들이다. 대성산성은 성벽의 길이나 그 규모 면에서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큰 것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장안성은 552년에 축조된 것으로, 지금의 평양 외성(外城)과 그 북쪽의 동천왕 대에 건조되었던 구 평양성을 합하여 이루어졌다. 장안성 내부는 전(田) 자형으로 구획을 정리하고 자갈로 도로를 정비하여 놓는 등 정제된 형태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평양성에서는 고구려 당시의 축조 사실을 알게 해 주는 이두체 명석(銘石)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왕궁인 장안궁은 창광산 동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원래 국내성에서 이곳으로 천도할 때의 왕궁은 대성산 남쪽 기슭에 있는 안학궁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유허만 남아 있다.
광개토왕이 이 지역을 중시하면서 영명사를 비롯한 아홉 개의 사찰을 지었다. 영명사는 한때 아도(阿道)가 주석하였던 고찰로, 원래는 기린굴 위쪽에 있었던 것을 1109년(예종 4)에 기린굴 아래로 이전하였다. 부벽루(浮碧樓)는 원래 영명사 범종루(梵鐘樓)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영명사에 승장(僧將)을 두고 승군을 통솔하게 하면서 따로 총섭(總攝)을 두어 평안도의 사원과 승려를 총괄하게 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때 병화로 소실되고, 칠성당(七星堂)과 팔각오층탑, 돌사자 등만 남아 있다.
497년(문자왕 6) 창건되었던 금강사(金剛寺)에는 거대한 팔각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절터에서 막새 등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부벽루 앞 대동강 건너편인 동대원리에도 1만여 평에 달하는 대왕사(大王寺) 사지가 있으나, 역시 기와 조각 등만이 발견될 뿐이다. 대성산 국사봉 기슭에서 발견된 2개의 금동불상은 고구려 조각 기법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평양 지역은 고려시대에 서경(西京)으로 중시되어 고려의 유적도 비교적 많은 편이다. 922년(태조 5)부터 평양 중성(中城)으로 일컬어지는 재성(在城)이 축조되기 시작하였고, 938년에는 뒤에 외성(外城)으로 일컬어지는 나성(羅城)이 축조되었다. 고려시대의 평양성이라 함은 바로 이 재성과 나성을 합한 것으로, 그 주위가 40여 리에 달한다.
성종 때 서경성을 수축하면서 대동문(大同門) · 보통문(普通門) · 경창문(景昌門) · 칠성문(七星門) · 함구문(含毬門) · 정양문(正陽門) 등의 여섯 대문을 건설하였다. 대동강변의 명소인 부벽루는 원래 고구려 때 남헌흥상인(南軒興上人)이 지은 영명루(永明樓)인데, 예종 때 이것을 수축하고 부벽루라 개칭하였다.
서경성의 동문인 대동문은 조선 초기에 개축되고 다시 1575년(선조 8)에 수축된 3층 누문으로, 평양의 대표적 고건축물이다. 영명사에 전하는 팔각오층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나부사에 있는 육각칠층탑도 이때에 만들어진 불교 유물이다. 한편, 단군의 사당인 숭령전과 기자 사당인 숭인전, 그리고 기자묘 등은 고려시대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조성되었던 유적들이다.
조선의 태종 · 성종 대에는 고려시대의 재성인 평양 본성을 수축하였고, 병자호란 후인 인조 때에는 국방 강화를 위하여 평양 내성을 쌓기 시작하여 1685년(숙종 11)에 완성하였다. 을밀대 서북에서 모란봉을 둘러싸고 있는 평양 북성은 1714년에 축성하였는데, 전금문(轉錦門)이 동문이고 현무문(玄武門)은 서문이다.
만수대의 영숭전(永崇殿)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화상을 모신 사당이다. 을밀대 북쪽의 민충단(愍忠壇)은 임진왜란 때 전사한 명나라 장병을 제사 지내는 사당이고, 서문 밖의 무열사(武烈祠)는 명나라 상서(尙書)이던 석성(石星)과 이여송(李如松)을 제사하는 사당이다. 관풍동의 의열사(義烈祠)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의기(義妓) 계월향(桂月香)의 사당이다.
서원으로는 용곡서원(龍谷書院) · 서산서원(西山書院) · 창강서원(蒼岡書院) · 소현서원(紹賢書院) 등이 있었으나, 거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대동강가 덕암(德巖) 위에 있는 연광정(鍊光亭)은 중종 때 건립된 뒤 여러 차례 중수된 조선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경승지로는 능라도 · 청류벽(淸流壁) · 모란봉 · 을밀대 등이 있다. 양각도 부근은 1866년 제너럴셔먼호사건이 발생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채관리에는 백선행기념관(白善行紀念館)이 있다.
고구려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국학 기관인 태학(太學)과 사학 기관인 경당(扃堂)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930년(태조 13) 학교가 설립되었다. 성종 때는 개경에 국자감(國子監)의 분교식 시설이 설치되어 지방 자제들의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향학(鄕學)도 운영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향교가 설립되어 많은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서당이 있어서 한문도 전수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향교의 교육 기능이 약화되고 많은 서원들이 세워졌는데, 1564년(명종 19) 기자를 배향한 인현서원(仁賢書院), 1593년(선조 26) 석성을 배향한 무열사, 1658년(효종 9) 선우협(鮮于浹)을 배향한 용곡서원, 1645년(인조 23) 을지문덕(乙支文德) · 김양언(金良彦)을 배향한 충무사(忠武祠) 등이 설립되었다.
그 밖에 이원익(李元翼)을 배향한 오리사(梧里祠), 갈의직(褐懿直) · 양택구(楊澤九)를 배향한 광산사(光山祠), 김상순(金相淳)을 배향한 소현서원 등을 비롯하여 서산서원 · 노계서원(蘆溪書院) · 숭령전 등 32개의 서원과 사우가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모두 철폐되고 무열사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개항 이후 기독교세가 왕성했던 지역이므로, 근대 교육기관으로 미션스쿨이 어느 지역보다도 많이 설립되었다. 북감리회 계통으로는 1894년 광성학교(光成學校), 1896년 숭덕학교(崇德學校) · 정진학교(正進學校), 1898년 맹아학교(盲啞學校) 등이, 북장로회 계통으로는 1897년 숭실학교(崇實學校), 1903년 숭의학교(崇義學校) 등이 세워졌다. 1907년에는 안창호(安昌浩)가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최초의 초등 교육기관은 1895년 설립된 평양심상소학교이며, 1938년 종로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최초의 중등 교육기관은 1906년 설립된 평양고등학교이며, 뒤에 평양제2공립중학교로 개칭되었다. 1905년 대학 과정을 신설한 숭실학교는 1912년에 숭실대학으로 승격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교가 되었다. 1923년 설립된 도립사범학교는 1929년 평양사범학교가 되었다.
그 밖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와 여자성경학교 · 여자고등성경학교 · 요한성경학교 등이 설립되어 유능한 교역자(敎役者)들을 양성하였다. 1945년 당시의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8개 교, 중등학교 14개 교, 전문학교 2개 교가 있다.
1954년 평양시에는 30여 개의 학교가 건설되었고, 수백 개의 학교가 복구되었다. 1960년에는 전반적 중등의무교육제가 실시되었고, 많은 수의 학교가 건설되었다. 대학은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김형직사범대학, 평양의학대학, 평양건설건재대학, 김원균명칭평양음악대학, 평양연극영화대학, 평양기계대학, 한덕수평양경공업대학, 평양미술대학, 평양외국어대학, 평양철도대학, 장철구평양상업대학, 조선체육대학, 김철주사범대학, 평양교원대학, 평양인쇄공업대학, 평양컴퓨터기술대학, 김보현대학, 김일성고급당학교, 인민경제대학, 금성정치대학 등이 있다.
시에는 또한 만경대기계전문학교, 평천전기전문학교, 평양경공업전문학교, 평양건재전문학교, 평양공예일용전문학교, 평양통계전문학교 등의 전문학교와 수십 개의 기능공학교가 있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위한 600여 개의 유치원이 있다. 또한 혁명가 유자녀들을 위한 만경대혁명학원과 강반석혁명학원이 있고, 과외교양기관인 만경대학생소년궁전, 평양학생소년궁전 등이 있다. 청소년들을 위한 소년단야영소, 등산야영소, 학생답사견학소, 아동도서관 등이 있으며, 전민 학습을 위한 도서관인 인민대학습당도 설립되었다. 또한 구역, 군마다 도서관이 건설되었다.
2009년 현재 평양시에는 대규모 창작 기관, 영화 촬영 기관, 극장, 영화관, 문화회관 등이 있다. 창작 기관 및 영화 촬영 기관으로는 조선문학창작사와 조선영화문학창작사, 만수대창작사,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등이 있다. 극장과 문화회관으로는 모란봉극장, 평양대극장, 만수대예술극장, 동평양대극장, 평양교예극장, 청년야외극장, 4.25문화회관, 인민문화궁전, 청년중앙회관 등이 있다. 영화관으로는 평양국제영화관, 대동문영화관, 낙원영화관, 개선영화관 등이 있다. 박물관으로 조선중앙역사박물관, 조선민속박물관, 조선미술박물관 등이 있으며, 그 외 중앙식물원과 중앙동물원도 있다.
주요 출판보도기관으로는 중앙정보통신국, 세계 각국과 전신 · 전화 통신과 우편물의 교환을 맡아 수행하는 국제위성통신국, 국제통신국 등이 있다.
평양시에는 또한 체육지도기관과 체육 단체들이 있다. 체육지도위원회와 체육 기술 발전을 위해 복무하는 기술협회, 집단체조창작단, 체육과학연구기관, 체육도서관 등이 있다. 또한 체육 간부 및 체육인 양성 기지인 조선체육대학이 있다. 모란봉 기슭에는 종합 경기장인 김일성경기장이 있고, 명승지 능라도에는 5월1일경기장, 양각도에는 양각도축구경기장이 있다. 만경대구역에는 종합 체육촌인 청춘거리가 있다. 여기에는 태권도전당과 서산축구경기장, 농구경기관, 배구경기관, 탁구경기관 등이 있다. 이곳에는 또한 양강호텔과 서산호텔이 있으며, 피로회복관, 체육인식당 등이 있다. 천리마거리에는 2만여 석의 평양체육관과 빙상관이 있다.
평양시는 현재 과거의 유물, 유적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건축물과 기념비 등이 공존하는 도시경관이 구성되고 있다. 고도로서 다양한 유물과 유적이 각지에 산재해 있으며, 많은 정치 · 행정 · 교육 · 문화 기관이 근현대적인 건축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특히 김정은 시기에 들어서는 려명거리, 송화거리, 미래과학자거리, 화성지구 등에 현대적인 고층 아파트 거리가 들어서고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도시경관의 형성은 도시 공간과 농촌 공간이 공존하는 북한 도시의 특성과 함께 시의 역사적, 장소적 특성이 융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고장의 설화로는 먼저 고구려를 창업한 동명왕과 관련된 「기린굴전설」을 들 수 있다. 「기린굴전설」에 따르면 동명왕이 기린마를 여기서 길렀다고 한다. 또한 왕이 기린마를 타고 이 굴에 들어와 땅속을 통해 조천석으로 승천한 곳이라고도 하는데, 그 흔적이 돌 위에 남아 있다. 이곳은 또 고구려시대의 가장 큰 군용 자금 저장 창고로 전해지고 있는데, 굴 깊숙이 들어가면 그에 관한 글이 새겨진 돌벽이 있다.
「대동강 속의 큰닻전설」은 홍수가 잦아서 큰 해를 입었던 평양 사람들이, 평양이 행주형(行舟形)이어서 대동강의 흐름에 쫓아 내려가고 있으니 닻을 내려 배를 붙들어 매어놓아야 한다는 풍수의 말을 듣고, 연광정 아래 강물 속에 큰 닻을 빠뜨렸더니 그 이후로 큰 홍수가 없었다는 내용이다.
「의열사전설」은 임진왜란 때 평양을 점령한 왜장의 애첩이었던 계월향이 김응서 장군을 오빠라 속이고 내통하여 왜장을 죽이고 자신도 죽은 의열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는 내용으로, 매년 봄 · 가을 두 차례에 걸쳐 평양 기생들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의구총전설」은 절개를 지키고 있던 미모의 젊은 과부가 자신을 탐내 침입해 온 이웃집 남자를 거절하여 죽임을 당하자, 그 과부가 기르던 개가 관가에 가서 계속 짖어 사정을 알리고 범인까지 알려주는 등 주인의 복수를 한 뒤에 죽었다는 내용이다. 이를 기념하여 마을 사람들이 무덤을 만들고 비석도 세워주었다고 한다.
「주암산전설」은 가난한 효자가 술을 즐기는 아버지에게 그것을 받아 드리지 못함을 늘 괴로워하다가, 어느 날 산에서 바위 아래 움푹 팬 곳이 술이 나오는 곳임을 알게 되어 아버지에게 매일 술을 대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지극한 효심에 감동하여 하늘이 내려준 술샘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본래 성천에 있었던 능라도가 큰비에 떠내려와서 지금의 모란봉 아래에 있게 되었으므로 성천의 관리가 평양에 와서 세금을 받아갔다는 「능라도전설」, 여씨(呂氏) 성을 가진 사람은 얼씬도 못 하게 한다는 관우를 모신 「서묘전설(西廟傳說)」 등이 있다.
평양시의 민요는 「간장타령」, 「국수 먹는 놀이」, 「권주가」, 「글자 읽기」[12], 「기러기를 보며」[12], 「꽃봉지」, 「꽃찾기」, 「나두 가요」, 「내 손은 약손」, 「늴리리」, 「느리개타령」, 「늠실타령」, 「다리세기」[12], 「달구소리」, 「달아달아」, 「돈타령」, 「둥개야」, 「둥개타령」, 「둥둥타령」, 「뒤로 걷기」, 「떡타령」, 「똥구랑뗑」, 「영감타령」, 「목도소리」[12], 「물푸는 소리」, 「방아소리」, 「배좌수 딸」, 「별 세기」, 「봉죽타령」, 「부엉이 우는 소리」, 「비둘기를 보며」, 「비야 오너라」, 「뻐꾸기 우는 소리」, 「상여소리」[12], 「서도아리랑」, 「수박따기」, 「수수께끼」, 「수자 읽기」, 「수투풀이」, 「앞이 빠진 갈가지」, 「양산도」[15], 「여긴 쨍쨍」, 「연띄우기」, 「연줄가」, 「우리 아가」, 「우리 형제」, 「자장가」[12], 「잠자리 잡으며」[13], 「장기타령」, 「장타령」[110], 「줄넘기」[17], 「쪼각 달아」, 「타복네야」[12], 「타복녀」, 「탕세기」, 「팽이치기」, 「풀마풀마」[12], 「풋콩가지」, 「하늬바람」 등이 있다.
평양시는 예로부터 가내수공업과 상업이 발전한 도시의 하나이다. 근세까지 북한의 도시 중에서 견직물과 면직물 생산량이 가장 많았으며, 다른 나라와의 무역과 상업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광복 전 제철, 제당, 방직, 기계, 시멘트 등 공업이 발족되어 서북 지대의 공업 중심지를 이루었다. 광복 후 북한의 경제적 중심지가 되었고, 현재 중공업과 경공업, 농업에서 중요한 생산도시이다.
평양시의 기계공업은 광복 후 새롭게 발전된 공업 부문으로, 시 공업의 주도적 부문 중 하나이다. 운수기계, 전기기계, 건설기계, 탄광기계, 공작기계, 정밀기계, 방직기계, 영화기계, 일반기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운수기계 생산의 중심지는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이다. 이 공장은 전기기관차, 내연기관차, 전동차, 객차 등을 생산해 철도운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평양시는 북한 내 주요 전기기계 생산지의 하나이다. 2009년 현재 평양전동기공장, 평양자동화기구공장, 평양측정계기공장, 평양326전선공장, 보통강전기공장, 평양조명기구공장, 새날전기공장 등이 있다. 여기서는 각종 전동기, 배전함, 계기류 등 여러 가지 전기계들과 함께 콤팩트전구, 형광등, 수은등을 비롯한 전구를 생산해 국가적 수요를 보장하고 있다. 또한 공장들에서 냉장고, 세탁기, 선풍기를 비롯한 가정용 전기 일용품들을 생산하고 있고, 그 밖에 통신 및 전력 케이블선, 에나멜선, 베어링 등이 생산된다.
건설기계 생산도 확대해 천정기중기, 주1, 승강기, 주2, 수평팔식기중기 등을 생산한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건설기계와 함께 건설 설비 및 난방용 부속품도 생산된다. 평양시는 또한 북한 공작기계공업에서 중요한 기지의 하나이며, 그중 만경대공작기계공장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여기서는 평삭반, 연마반을 비롯해 여러 가지 공작기계를 생산한다. 이 밖에 평양탄광기계공장, 평양가금설비부속품공장 등이 있다.
방직공업에 필요한 방직기계, 방적기계, 편직바늘 등을 생산하는 기계공장으로는 평양방직기계공장, 평양편직바늘공장, 평천재봉기부속품공장 등이 있다.
평양시에서 전력공업은 광복 후 새로 창설된 공업 부문이다. 평양시 전력공업은 대부분 화력발전에 의한 전력 생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평양화력발전연합기업소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큰 공장, 기업소들에 중소 규모의 화력발전소들이 있다. 미립갑문, 봉화갑문 등 갑문에는 급류식 주3가 있다. 또한 관개수로와 저수지들을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소형 발전소들도 있다.
평양시에는 도시 건설과 산업 건설의 수요를 마련하기 위한 건재공업 기지가 마련되어 있다. 북한은 평양시의 건재공업이 자체의 원료 원천에 의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시에는 시멘트공업 발전에 필요한 석회석과 무연탄이 풍부하며, 요업 원료인 점토와 백토, 석재공업 발전에 필요한 장석 · 화강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석재 자원, 부재 생산에 필요한 모래 · 자갈 등 골재 원천이 많다. 시는 또한 기계, 금속, 화학, 전기, 목재가공공업과 같은 공업 부문을 가지고 있어 건재공업을 발전시키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평양시에는 승호리시멘트공장, 상원시멘트연합기업소, 평양석재공장, 강남요업공장, 평양건재공장, 평양금속건재공장, 대성요업공장, 만경대애국윰창공장, 평양수지건재공장, 평양전기건재공장, 평양목재공장, 평양화학건재공장 등 40개의 건재공장이 있다. 평양시의 건재공업 발전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부문은 시멘트 생산이다. 승호리시멘트공장은 광복 후 건설되었으며, 원료의 주입부터 제품의 생산과 포장에 이르는 공정에서 원격조종화, 컴퓨터화가 실현되었다고 한다.
평양시의 경공업은 광복 후 급성장하였다. 대규모 경공업 공장과 중소 규모 경공업 공장이 있으며, 방직, 피복, 편직, 식료, 일용품, 신발공업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직 및 피복, 편직공업은 시 경공업에서 주도적 부문의 하나이다. 시에는 전국적 의미를 가지는 평양방직공장, 김석숙평양제사공장, 애국편직물공장, 선교편직공장 등이 있다. 평양방직공장은 실 뽑는 공정으로부터 직포, 염색, 가공 등 모든 공정을 갖추고 천을 생산하는 대규모 방직공업 기지 중 하나이다. 여기서는 고급비단천, 면천, 혼방천, 공업용 천을 비롯한 여러 가지 천이 생산된다. 또 누에고치를 가공하여 명주실을 뽑는 김정숙평양제사공장을 비롯해 여러 가지 실을 뽑는 공장들이 있다. 평양방직공장과 김정숙평양제사공장에서 나오는 실들을 주원료로 하고 있는 평양애국편직물공장, 선교편직공장, 평양어린이편직공장 등에서 다양한 천을 생산하여 인민경제 부문에 공급하고 있다.
평양의 식료공장도 전국적 의미를 가지며, 주식물 및 부식물 가공, 기초식품 생산, 당과류 생산, 음료 생산 등 여러 부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국적 의미를 가지는 평양밀가루가공공장, 즉석국수공장, 용성고기가공공장, 평양곡산공장, 평양기초식품공장, 평양알콜공장, 대동강맥주공장, 경련애국사이다공장, 용성요구르트공장, 평양어린이식료공장 등이 있다. 평양밀가루가공공장은 원료 투입부터 제품 포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정이 진행되고, 빵, 국수, 과자, 효모 등이 생산된다. 평양기초식품공장은 간장, 된장, 콩기름, 조미료 등을 생산한다. 용성고기공장은 시의 종합적인 부식물 생산기지로서, 여러 가지 고기 가공품과 과일, 남새 가공품, 수산물 가공품을 생산한다. 평양곡산공장은 사탕, 과자, 농마, 물엿, 포도당, 기름과 청량음료를 생산한다. 대동강맥주공장과 경련애국사이다공장에서 각각 생산되는 ‘대동강맥주’, '랭천사이다'는 유명한 생산품이다.
평양시는 수도 주민들을 위한 채소, 곡물, 육류, 과일 생산 부문과 잠업 등 농촌 경리의 여러 부문을 다 갖추고 있다. 평양시 주변 구역에는 국영 농목장과 과수원들이 꾸려져 있으며, 협동농장들에는 알곡 생산과 함께 채소 및 공예작물 생산, 축산업과 과수업, 잠업 등 여러 부문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었다. 2009년 현재 시의 농지 중에서 논이 약 35%, 밭이 50% 이상, 과일밭이 약 10%를 차지한다.
평양시의 농산업은 곡물과 채소 생산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감자류, 공예작물, 사료 작물 생산이 결합되어 있다. 평양시 곡물 생산은 수도 시민의 식량을 보장하면서 축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큰 의미를 가진다. 주요 곡물은 벼, 강냉이, 콩이며, 이 밖에 밀, 보리, 수수, 완두, 팥, 녹두, 메밀 등이 있다. 시 곡물 생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벼이다. 주요 벼산지는 강남군, 낙랑구역, 순안구역, 만경대구역, 중화군, 사동구역이다. 이 지역에서 나는 벼는 시 벼 생산량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시 곡물 생산에서 논벼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강냉이이다. 강냉이는 주로 중화군, 상원군, 강남군, 강동군, 승호구역에서 많이 난다. 이 구역, 군들의 강냉이 파종 면적은 시 전체 면적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특히 강동군은 시 안에서 강냉이가 가장 많이 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평양시는 또한 축산업과 가금업이 발전하여 평양 시민들의 식생활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닭, 메추리, 오리, 타조, 거위 사육을 전문으로 하는 국영 가금업과 돼지, 소, 염소, 토끼 사육을 전문으로 하는 국영 축산업, 닭, 오리, 돼지, 소, 염소, 양, 토끼 등을 집단적으로 기르는 협동농장의 중소 규모 축산업 및 가금업, 개인 부업 축산이 있다. 시에는 평양돼지공장, 강동구빈축산전문협동농장 등 축산 기지들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강동구빈축산전문협동농장은 약 1,000정보의 인공 풀밭과 축산 설비들이 준비된 축산 기지이다. 평양돼지공장은 공업적인 방법으로 돼지고기를 생산하는 대규모의 돼지공장이다. 시에서는 종축장들을 건설해 토끼를 비롯한 가축을 기르고 있다. 또한 대규모 가금업 기지들인 만경대닭공장, 두단오리공장, 강동오리공장, 상원오리공장, 삼석오리공장, 순안오리공장 등이 있다.
평양시의 과수업은 수도 시민들에게 신선한 과일을 공급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역포구역, 순안구역, 중화군, 상원군, 강동군에는 시 과일밭 면적의 60% 이상이 있다. 사과는 시 과일밭 면적에서 첫 번째 순위를 차지한다. 만경대구역, 역포구역, 강동군, 상원군, 대성구역은 시 사과 생산량의 약 70%를 차지한다. 배는 여러 지역에서 재배되는데, 특히 역포구역의 배 생산량은 시 배 생산량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복숭아는 재배 면적과 생산량에서 사과, 배 다음의 순위를 차지한다. 그 밖의 특산물로 사동구역의 ‘덕동대추’, 강동군의 '평양밤'이 유명하다.
평양시는 예로부터 대구 · 강경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시장이라 불리던 상업도시였으며, 1898년 개시장(開市場)으로 지정되어 중국과의 무역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일본의 중국 대륙 진출을 위한 병참기지화와 식민지경제정책으로 인하여 급속하게 발달한 평남공업지대의 핵심 지역으로서, 경의선이 개통되고 일본인이 대량으로 이주하면서 직교식 신시가지가 확대 · 형성되었으며, 상업지구가 이루어졌다.
1910년대까지는 종로 일대 상영시장(上營市場)을 중심으로 정기시장이 열려 농수산물 · 생활필수품 · 신탄 등의 거래가 있었으나, 1920년에 공설시장제가 실시되며 정기시장은 기능을 잃게 되었다. 대표적인 공설 시장으로는 신창리의 사창공설시장, 신양리의 신양공설시장, 인흥리의 인흥공설시장, 선교리의 선교공설시장 등이 있었다.
특히 사창공설시장은 평양객주의 근거지이며, 곡물류 · 식료품 · 주단 · 포목 · 피혁 · 어물류 · 생활필수품 등의 도산매 활동이 활발하여 관서 지방 경제 유통의 중심 기능을 담당하였다. 또한 신양리의 평양가축시장은 1·6일에 개시되어 평양소의 거래가 활발하였다. 평양어시장은 수산물을 거래하는 공설 시장이고, 평양식량품시장은 1년에 6일만 휴장하는 상설 곡물 시장이다.
이러한 시장과 더불어 경제 유통의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상가의 상점들이다. 남문 · 서문 · 대동문 · 영문통(營門通) · 신창리 일대의 상가는 일반 생활필수품을 취급하였으며, 일본인들의 중심 거주지였던 신시가지에도 생활필수품을 취급하는 잡화점이 많았다.
대표적인 상점으로 평안백화점(平安百貨店) · 화신백화점(和信百貨店) · 윤세식상점(尹世植商店) · 중앙상회(中央商會) · 삼광상회(三光商會) 등이 있었고, 그 밖에도 유명한 상점들이 많았다. 그리고 화상(華商)의 대부분은 종로 · 대동문 · 이문리 일대를 중심으로 직물류 수입 판매 · 중국 잡화 · 요식업에 종사하였으며, 일본인들은 신시가지를 중심으로 생활필수품을 판매하였다.
2023년 현재 평양시 중심부에는 19개 이상의 종합 시장이 있는데, 중구역과 평천구역, 대성구역, 만경대구역에 집중해 있다. 이들 지역에 서포2동시장, 용흥시장, 남교동시장, 하신시장, 인흥시장, 붉은거리2동시장, 당상시장, 칠골시장, 평천시장, 중구시장, 통일거리시장, 낙랑시장, 원암동시장, 능라2동시장, 소룡1동시장, 문신1동시장, 송신시장, 대흥동시장, 역포시장 등이 있다.
평양시는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광복 후 삼신윤탄선이 부설되는 등 교통과 운수의 발전이 추진되었다. 평양시 운수는 철도운수, 자동차 운수, 하천 운수, 항공 운수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철도운수는 시 운수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광복 후 철도 배치를 개선하고 지선과 전용선, 인입선 철도들을 새로 놓아 철도운수 중심지로서의 철도망이 준비되었다. 철도의 전기화가 완성되었고, 평양, 서포 등 시 안의 역들을 개건하고 수송 작업을 기계화함으로써 철도 화물 수송량이 확장되었다.
평양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뻗어 나간 주요 철도는 평의선[평양신의주], 평라선[평양~라진], 평남선[평양~평남온천] 등이 있고, 혜산, 평강, 청수, 만포, 해주, 장연, 철광 방면으로 기차가 다닌다. 2009년 현재 평양모스크바 사이, 평양~베이징 사이에는 국제 열차가 다니며, 강동, 순안, 대평 등 방향으로 통근 열차가 다닌다.
평양시 운수에서 자동차 운수도 큰 의의를 가진다. 평양을 중심으로 신의주, 원산, 만포, 사리원, 개성, 남포 등 여러 방면으로 도로가 뻗어 있다. 또한 지역 간의 운수적 연계를 보장하기 위해 건설된 옥류교, 보통교, 만수교, 충성의 다리, 양각다리, 능라다리, 청류다리 등이 있다. 여객 운수도 발전되었는데, 시내 여객 운수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은 궤도전차이다. 무궤도전차도 시 안의 여객 수송에서 의미 있는 도시 여객 수송용 운수 수단이다. 그 밖에 버스, 승용차, 지하전동차 등을 이용하는 여객 운수도 발전하였다. 평양지하철도는 평양시 교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강하천 운수는 서해갑문이 건설되면서 대동강을 이용한 수상 운수가 발전하였다. 평양만경대, 미림봉화, 김일성광장주체사상탑, 평천두루섬, 만경대강남, 평천황해남도 해안 일대 사이에 여객선 항로가 배치되어 수도 시민들의 교통상 편의를 보장하고 있다. 2009년 현재 대동강을 이용한 여객 수송과 화물 수송이 발전하고 있다. 대동강을 이용하여 철광석, 건재, 농산물 등이 운반된다.
평양시에는 200여 개의 공원과 유원지가 있고, 고전미와 현대적 양식이 조화를 이룬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많다.
모란봉구역에는 북한의 국보 1호인 평양성 및 성곽, 누각들이 있다. 또한 조선의 8대 누각 중 하나인 을밀대도 여기에 있다. 중구역은 평양의 중심지로, 대부분 건물이 한국전쟁 이후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다. 인민문화궁전은 정상회담 때 만찬 장소로 이용되는 등 남한에도 잘 알려진 곳이다. 만경대구역에는 김일성 생가와 체육인 거리인 청춘거리가 있으며, 북한의 교예를 관람할 수 있는 교예극장도 있다.
시의 대표적인 역사 유적인 단군릉은 중구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하며, 9단의 흰색 화강암으로 조성되어 있다. 대동문은 고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평양성과 함께 6세기 중엽에 건축된 유서 깊은 유적이다. 을밀대 역시 고구려 평양성의 내성으로 1714년에 개축되었는데, 을밀대의 봄놀이는 평양팔경의 하나로 유명하다. 이외에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진 유명 관광지인 만수대, 개선문, 주체사상탑, 학생소년궁전 등이 있다.
도심을 남북으로 잇는 대동강변은 휴식 공간이며, 인민대학습당을 시작으로 중앙역사박물관, 조선민속박물관, 조선미술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이외에 대동강 근처 중구역 대동문동에 북한 국보 1호인 대동문이 있으며, 관서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연관정이 위치한다.
시의 중앙에 위치한 모란봉은 모란꽃 같이 생겼다고 해서 모란봉이라 불린다. 깍아지른 듯한 청류벽 밑으로 대동강이 흐르고, 청류벽 위에는 부벽루가 자리 잡고 있다. 모란봉에는 을밀대, 최승대, 칠성문, 청류정, 부벽루 등 이름난 고적이 많다. 경상골에는 야외극장과 유희 시설이 있다. 모란봉은 경관이 아름다워 ‘천하 제일강산’이라 불렸고, ‘조선팔경’으로 손꼽혀 왔다.
능라도는 대동강 가운데에 있는 길이 2.7㎞, 주위 6㎞의 가늘고 긴 하중도로, 섬 전체가 유원지이다. 모란봉의 청류벽과 그 기슭에 부딪히는 대동강의 푸른 물결과 어우러져 물 위에 뜬 꽃바구니를 연상시킨다는 능라도는 평양의 절경으로 꼽힌다. 이곳에는 평양축전을 위해 건립한 대규모 경기장인 5.1경기장도 있다.
대성산은 평양시의 중심부에서 북동쪽 약 8㎞ 지점에 있다. 해발 270m이며, 고구려 장수왕이 도읍지를 옮기며 축조한 대성산성이 있다. 또한 대성산 고구려 고분군과 광개토대왕이 392년 건립한 광법사도 있다.
용악산은 만경대구역에 위치하며, ‘평양의 금강산’으로 관광 상품에 소개되고 있다. 유럽의 관광 코스에는 날씨가 따뜻한 계절에 용악산에서 피크닉을 하면서 점심을 먹는 상품들이 있다. 북한에서는 산봉우리가 마치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것같이 생겼다고 하여 용악산이라 하며, 용곡서원, 법운암과 4개의 국가천연기념물이 있다고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