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때는 성단사(聖旦使)라고도 했고, 정조사(正朝使)·동지사(冬至使)와 더불어 삼절사(三節使)라고도 하였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보내던 임시 사행이 아니라 정례사행이었다.
이 정례 사행은 원래는 별도로 엄격히 지켜지다가 1645년(인조 23) 부터 서로간의 편의를 보아 날짜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 정조에 보내기로 하였다. 이후 1723년(경종 3)에 다시 강조되어 그 뒤로는 동시에 시행되었다. 이 정례 사행을 삼절 겸 연공사(三節兼年貢使), 혹은 줄여서 동지사·절사(節使)라 불렀다.
이 사행은 매년 10월말이나 12월초에 떠나서 그해가 지나기 전에 북경(北京)에 도착해 40∼60일 유련(留連 : 객지에서 오랫동안 머물음)한 다음 2월중에 떠나서 3월말이나 4월초에 돌아오는 것이 통례였다.
사행의 구성은 정사·부사·서장관 각 1인, 대통관(大通官) 3인(首譯堂上官 1인, 上通事 2인), 호공관(護貢官, 押物官이라고도 함.) 24인 등 도합 30인으로, 이들은 이른바 정관(正官)이라 하여 정해진 숫자가 있었다.
그밖에 종인(從人)은 제한이 없었다. 그러나 1668년(현종 9)에는 이 숫자가 지나치게 많아 말썽이 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250명 내외였으나 1755년(영조 31) 절사 때에는 541명이나 된 적도 있었다.
이들이 가지고 가는 예물은 여러 번 증감으로 인해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에게는 모시·명주·화석(花席)·수달피 및 두꺼운 유지(油紙) 등이고, 황후에게는 모시·명주·화석 등이며, 황태후에게는 황후와 같았다.
이 예물은 호조에서 사신과 더불어 간품(看品 : 품질의 내용을 살핌)하고, 예조에서 추택(推擇 : 품질을 살펴 가려 뽑음)해 최종 어람(御覽)을 거친 다음 싸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