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 윤순지(尹順之), 부사 조경(趙絅), 종사관 신유(申濡) 등이 1643년(인조 21) 2월부터 11월까지 10개월간 일본을 다녀온 사실에 관한 일기로, 내용은 비교적 소략하다. 별다른 기사도 없이 어느날 어디에 머물렀다는 정도의 기록에 그치고 있으며, 영물시(詠物詩)는 한 편도 없다.
이 책의 저자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사신들과 함께 기거할 수 있는 직위를 가진 수행원 중의 한 사람으로 추측된다. 그 때의 사행은 도쿠가와(德川家光)의 아들(德川家綱)의 생일 축하를 위하여 파견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잡혀간 포로들의 쇄환(刷還) 임무도 겸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청나라와의 미묘한 관계 때문인지 일본의 기병에 대한 관심도 매우 커서 지금 관백(關白 : 천황을 보좌하여 정사를 집행하던 일본의 관직명)은 조선을 어떻게 생각하며 혹시 군사를 일으킬 뜻은 없는가를 묻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 포로인 안경우(安慶佑)가 의술로 300석의 녹을 받는다는 사실과, 일본의 민부(民富)나 국력이 조선에 비해 월등하다는 점을 자주 들었다. 이 밖에도 일본의 주에 대해서 다스리는 자가 누구이며, 도쿠가와와는 어떤 관계이며, 식읍은 얼마인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사행 중 두 나라 사이에 제기된 예의 문제로는 도쿠가와 집안의 가묘인 닛코산(日光山) 배례 때 절을 두 번으로 하느냐(조선사신의 주장) 네 번으로 하느냐(대마도주의 주장), 나이 어린 아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느냐 하는 것 등이었다. 전자는 두 번으로, 후자는 인사교환 차 나오지 않게 되어 별문제는 없었다.
국서의 어휘 문제도 비교적 조선 측의 주장에 선선히 따랐다. 또 조선의 마상재(馬上才), 즉 말 위에서 부리는 재주와 기사(騎射)에 대해 관백의 관심이 퍽 깊었음도 알 수 있다. 포로된 자들의 쇄환은 몇 명에 불과한 듯한데 정확한 숫자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 때의 사행에 관한 다른 기록으로는 조경의 『동사록(東槎錄)』과 신유의 『해사록(海槎錄)』이 있다. 두 책 모두 대부분 시로 구성되어 있어, 쓰기 전에 미리 간략한 내용을 적어두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