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행명(涬溟). 윤변(尹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두수(尹斗壽)이다. 아버지는 관찰사 윤훤(尹暄)이며,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로 대사헌 심의겸(沈義謙)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를 거쳐 1620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언관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아버지가 평안도관찰사로서 적의 침입을 막지 못한 죄로 사사(賜死)되자 10년 동안 은거하였다.
1629년 홍문관부교리에 다시 등용되고,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적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잇길로 성중에 들어가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환도 후 형조참의가 되고 1643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부사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654년(효종 5) 경기도관찰사로 재직할 때 소송사건을 빨리 처리하지 않아 민원을 사서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 1657년 실록수정청당상(實錄修正廳堂上)이 되어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도승지·육조의 참판·개성유수·한성판윤·대제학을 거쳐, 1663년 공조판서·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종조(從祖) 윤근수(尹根壽)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시(詩)·사(史)·서(書)·율(律)에도 뛰어났다.겸손하고 근면하였으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돈후하였다. 앞서 아버지가 화를 당한 것을 항상 잊지 않고 왕의 잘못이 있더라도 직언은 하지 않았으며 조정에 있어서도 객처럼 처신하였다고 한다. 저서로는 『행명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