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덕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동지의금부사, 부총관,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득지(得之)
소봉(蘇峰), 이안당(易安堂)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7년(선조 10)
사망 연도
1639년(인조 17)
본관
광산(光山)
주요 관직
형조참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동지의금부사, 부총관,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득지(得之), 호는 소봉(蘇峰)·이안당(易安堂). 김숙문(金叔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종(金綜)이고,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김원록(金元祿)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원국량(元國良)의 딸이다.

큰아버지 감찰 김원상(金元祥)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1년(선조 34) 진사가 되고, 이해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을 거쳐 1603년에 대교가 되었다. 병조좌랑·정언·충청도도사에 이어 1613년 병조좌랑과 그 뒤 지제교·서산군수(瑞山郡守)·한성부좌윤·판결사·동지의금부사·부총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시키려는 폐모론에 극력 반대하다가 삭직당하였다. 인조반정 후 사간이 되어 인조의 사친추숭(私親追崇)의 잘못을 주장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척화신(斥和臣)을 적에게 보내자."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반대하는 소를 올렸으나, 인조의 동의를 얻음으로써 화를 부를 소지를 없앴다. 벼슬이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글씨에 뛰어났는데, 초서·예서에 능하였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낙전당집(樂全堂集)』
『해동호보(海東號譜)』
『동국문헌(東國文獻)』필원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