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시 ()

남양주 시가지
남양주 시가지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경기도 중앙에 위치한 시.
정의
경기도 중앙에 위치한 시.
개관

동북쪽은 가평군, 동쪽은 북한강을 끼고 양평군, 서북쪽은 의정부시, 서쪽은 서울특별시, 남쪽은 구리시·하남시·광주시, 북쪽은 포천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05′∼127°31′, 북위 37°31′∼37°41′에 위치한다. 면적은 458.1㎢이고, 인구는 65만 3454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5개 읍, 4개 면, 7개 행정동(11개 법정동), 374개 행정리(49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다.

자연환경

광주산맥의 남단에 위치하여 전체적으로 해발고도가 높은데 동부는 산지지역이고 서부는 평야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서쪽에는 수락산(水落山, 638m)·불암산(佛巖山, 508m)이 서울특별시와, 동쪽은 상산(霜山, 825m)·축령산(祝靈山, 879m)이 가평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에는 주금산(鑄錦山, 814m)이 포천시과, 남쪽에는 천마산(天摩山, 819m)과 백봉(白峰, 590m)이 있다.

이 밖에 수리봉(537m)·천마산(711m)·운길산(雲吉山, 610m)·예봉산(禮峰山, 679m)·문안산(文安山, 536m)이 솟아 있다.

이들 산지 사이로 왕숙천(旺宿川)이 남류하여 한강에 합류하며, 수동천(水洞川)·구운천(九雲川)·마석우천(磨石隅川) 등이 동류하여 북한강에 합류한다. 왕숙천 유역의 퇴계원, 한강 유역의 화도읍과 와부읍에는 범람원이 발달하고 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조안면·와부읍에는 하중도가 발달하고 일부지역에는 구하도의 흔적과 하안단구가 곳곳에 나타나 있다.

연평균 기온은 12.1℃, 1월 평균기온 -2.1℃, 8월 평균기온 23.8℃이며, 연강수량은 778.3㎜이다.

역사

한강의 북안에 접한 지역으로서 구석기시대부터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구석기유적은 화도면 감터, 와부읍 송촌리·진중리·능내리에서 발견되어 남양주 일대에는 이미 전기 구석기부터 사람들이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지금동·수석동·동막동·선암리 등 한강변의 하상퇴적지와 구릉 말단부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흑요석기와 즐문토기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신석기시대의 유적에 비해 분포밀도가 급증하고 있음을 볼 때,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동·가운동·수석동·이패동·삼패동·도농동과 와부읍의 도곡리·덕소리, 조안면의 진중리 등지에서 돌화살촉·다두석부(多頭石斧)·반달모양돌칼·간돌창 등이 발굴되었다.

청동기시대에 이어 철기시대는 역사적으로 삼한시대로, 남양주 일대는 마한에 속했던 곳으로 추측된다. 마한 54국 중 고리국을 풍양·양주일대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남양주는 백제의 영역에 속했으며, 『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475년(장수왕 63)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한강 남안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된 뒤 매성군(買省郡) 또는 창화군(昌化郡)에 속하였다.

또한 고구려 영역 하에 진건·진접읍 지역은 한산주(漢山州)에 속한 북한산군(北漢山郡) 관내의 골의노현(骨依奴縣)으로 불렸다. 551년(성왕 29) 나제동맹(羅濟同盟)으로 백제가 다시 이곳을 회복한 뒤에는 백제에 잠시 귀속되었다.

신라 진흥왕은 2년 후에 백제가 점유한 한강 하류지역마저 탈취하여 한강유역 일대는 신라에 의해 모두 점유됨과 동시에, 이곳에 북한산주(北漢山州)가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 16) 군현제를 정비하면서 양주지역 일대는 내소군(來蘇郡)으로, 진건·진접읍 지역인 골의노현을 황양(荒壤)으로 개칭하였다. 이때 황양은 북한산에서 이름이 바뀐 한양군(漢陽郡), 치소 慶州)에 속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935년(태조 18) 한양군이 양주 또는 남경(南京)으로 바뀌었는데, 양주라는 지명은 후삼국시대에도 사용되었으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보편화되었다. 고려 태조 때 현 양주군 지역은 견주(見州)로 되었고, 동두천 지역은 사천(沙川), 남양주의 진건읍·진접읍 지역은 풍양현(豊壤縣)으로 불렸으며 양주의 속현이 되었다. 이때 평구도(平邱道, 남양주시 양정동)는 남경에, 조안면 지역은 광주에 속하였다.

983년(성종 2) 양주에 목사가 두어졌고, 995년(성종 14)에는 관내도에 속했으며, 양주는 좌신책군절도사(左神策軍節度使)의 부임지로서 광릉(廣陵)으로 별칭되기도 하였다. 1012년(현종 2) 양주에 절도사가 폐지되고 안렴사가 설치되었으며, 1018년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다.

1067년(문종 21) 양주가 남경유수로 승격되었다가 곧 격하되었으며, 1099년(숙종 4) 남경에 도성이 축조되었다. 이를 전후하여 풍양현·견주·사천 등은 남경의 직할지가 되었으며, 그 뒤 1308년(충렬왕 34) 남경은 한양부로 격하, 개칭되었다.

1394년(태조 3) 조선왕조가 한양부에 도읍을 정하면서 한성부(漢城府)로 개칭되었고, 양주의 치소가 아차산(峨嵯山) 남쪽의 대동리(지금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부근)로 옮겨졌고, 양주가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다. 이듬해양주부로 승격되었고, 1397년에는 치소가 견주(고주내, 지금의 양주시 고읍동)로 옮겨지고 이곳이 양주로 불렸다.

1413년 양주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419년(세종 1)에 잠시 양주의 관할로 되었으며, 1466년(세조 12) 양주목이 되어 진(鎭)이 설치되었다. 이때 풍양현이 양주목의 속현으로 되었으며, 1504년(연산군 10) 양주목이 폐지되고 왕의 사냥터가 되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인 1506년(중조 1) 양주목으로 복구되었다.

이 때 양주의 치소가 불곡산 남쪽(지금의 양주시 유양동)으로 옮겨졌는데, 지금의 남양주시 지역을 포함하여 35개 면을 관할하였다. 남양주의 옛 이름은 풍양인데, 이 고장은 바로 풍양조씨(豊壤趙氏)의 관향이기도 하다.

이 고장에서는 조선시대의 학문과 사상을 빛낸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수석등 석실서원(石室書院)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썼던 17세기 중엽의 학자 이단상(李端相, 호 靜觀齋)의 문하에서는 이희조(李喜朝)·김창협(金昌協)·민진후(閔鎭厚)·김창흡(金昌翕)·임영(林泳) 등 학문의 일가를 이룬 쟁쟁한 학자들을 많이 배출, 조선 중기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큰 학맥을 형성하였다.

특히 19세기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로 불리는 정약용(丁若鏞, 호 茶山)은 지금의 와부읍 능내리 마재(조선시대 광주부 초부면)에서 출생, 유배에서 풀려난 뒤 이곳 향리의 여유당(與猶堂)에서 만년의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을 마무리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정에 따라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로 나뉠 때 한성부 소속 양주군이 되었다가, 이듬해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로 개편될 때 경기도 양주군이 되었다.

1906년 광주군 초부면(草阜面)이 양주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양주군은 주내·희천·은현·광적·백석·시둔·별내·진접·진건·화도·와부·미금·구리·노해·이담·장흥의 16면 148개 리를 개편 관할하였는데, 이 중 남양주 지역과 관련된 것은 7개 면이었다.

1938년 10월 군청이 주내면 유양리에서 시둔면으로 옮겨지면서 동시에 양주면이라 개칭되었고, 1942년 10월 양주군이 의정부읍으로 승격되었다. 1919년 3월 13일 미금면민들의 독립만세시위를 비롯하여 각 면민들이 봉기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고장이 배출한 근대의 인물로는 1905년 을사조약에 분격하여 자진한 조병세(趙秉世), 의병운동을 전개하다가 순국한 의병장 하상태(河相泰) 등이 있다.

1946년 연천군의 남면이 양주군에 편입되었고, 1950년 6·25전쟁 때 수동면을 무대로 활약한 대한민국백혼대(大韓民國白魂隊)의 반공활동은 특기할 점이다. 1963년 1월 1일 이담면이 동두천읍으로, 의정부읍이 시로 승격되었다.

이 때 화도면의 3개 리(운수·송천·지둔)와 진접면의 1개 리(수산), 그리고 가평군 외서면의 3개 리(입석·외방·내방)가 병합되어 수동면이 신설되었다. 또한, 노해면과 구리면의 5개 리(묵동·중화·상봉·신내·망우)가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 구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79년 5월 1일 미금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 4월 1일 구리·미금 2개 읍과 별내·진접·진건·수동·화도·와부의 6개 면, 68개 리가 분리되어 남양주군이 신설되었는데, 이 때 별내면의 고산·산곡의 2개 리가 의정부시에 이속되었다. 이 해 12월 1일 와부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3읍 5면이 되었고, 1983년 2월 15일 진건면의 양지·오남·팔현의 3개 리가 진접면에 편입되었다.

1986년 1월 1일 구리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4월 1일 와부읍 조안출장소가 조안면으로, 퇴계원출장소가 퇴계원면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1989년 1월 1일 미금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4월 1일 진접면이 읍으로, 1991년 12월 1일 화도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듬해 4월 1일 진접읍 오남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95년 1월 1일 도농통합에 따라 미금시와 남양주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남양주시가 되었으며, 5월 6일 양지·오남·팔현의 3개 리가 오남면으로 승격되었다. 2001년 9월 12일에 진건면과 오남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5년 6월 청학출장소, 2006년 1월 풍양출장소, 2006년 11월 동부출장소가 각각 개소되었다.

2012년 1월 별내동이 개청되었으며, 2016년 1월 3개 행정복지센터(와부·조안, 화도·수동, 호평·평내)가 개청되었다.

유물·유적

한강유역에 위치한 이 고장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화도읍 금남리의 고인돌에서는 빗살무늬토기·민무늬토기 조각이, 퇴계원면 퇴계원리의 고인돌에서는 빗살무늬토기가 각각 나왔으며, 조안면 진중리 고인돌 중 3기에서 간돌도끼·간돌화살촉·빗살무늬토기·민무늬토기·방추차 등이 출토되었다.

지금동·가운동·삼패동에서도 돌화살촉·홈도끼[有溝石斧] 등이 출토되었고, 수석동·가운동·와부읍 도곡리에서도 선사주거지가 발굴되었으며, 도농동에서는 선돌이 발견되었다.

가운동 지석묘(경기도 문화재자료, 1990년 지정)는 기반식 지석묘로서 주변에서 돌화살촉들이 수습된 바 있다.

수석동의 수석리 토성(경기도 기념물, 1986년 지정)은 백제 초기의 토성으로서 그 일대에는 선사시대부터 집단거주한 흔적이 발견된다.

불교문화재로는 진접읍 부평리에 봉선사(奉先寺), 별내동에 흥국사 대웅보전(경기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와부읍 월문리에 묘적사(妙寂寺), 조안면 송촌리에 수종사(水鍾寺) 등의 사찰이 있다.

봉선사 경내에는 봉선사 동종(보물, 1963년 지정)·봉선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보물, 2012년 지정), 수종사 경내에는 수종사 부도 사리장엄구(보물, 1963년 지정)·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보물, 2013년 지정)·남양주 수종사 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1995년 지정), 별내면 청학리에 남양주 내원암 괘불도(경기도 유형문화재, 2004년 지정), 와부읍 월문리에 묘적사 팔각칠층석탑 등이 있다.

불교관련 전적류로는 별내동 불암사에 불암사 경판(경기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등이 있다.

능묘로는 금곡동에 홍릉과 유릉(사적, 1970년 지정), 진접읍 부평리에 광릉(사적, 1970년 지정), 내각리에 순강원(사적, 1991년 지정), 장현리에 영빈묘(사적, 1991년 지정), 부평리에 휘경원(사적, 1991년 지정), 송릉리에 광해군묘(사적, 1991년 지정), 진건읍 사릉리에 사릉(사적, 1970년 지정), 송릉리에 성묘(사적, 1991년 지정)·안빈묘(사적, 1991년 지정) 등이 곳곳에 있다.

또한, 조안면 능내리에 정약용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1972년 지정), 화도읍 창현리에 흥원(경기도 기념물, 1978년 지정), 별내동에 덕흥대원군 묘(경기도 기념물, 1980년 지정), 조안면 시우리에 류량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제78호), 와부읍 덕소리에 김상용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1987년 지정)·김상헌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1987년 지정)가 있다.

또한 도곡리에 이맹현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1987년 지정), 화도읍 차산리에 이순지선생 묘(경기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조안면 능내리에 한확선생 신도비(경기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등 역사적 인물들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이외에도 도곡리에 신빈신씨 묘역(경기도 문화재자료, 2001년 지정), 삼패동에 청풍김씨 문의공파 묘역(경기도 기념물, 2001년 지정), 화도읍 녹촌리에 능원대군 이보 묘역(경기도 문화재자료, 2002년 지정), 진접읍 금곡리에 신재 한상경 영정(경기도 유형문화재, 1998년 지정)·양평공 한계순 묘역(경기도 문화재자료, 2001년 지정), 평내동에 의안대군 사당, 별내동에 구정 남재 묘역(경기도 문화재자료, 2002년 지정), 와부읍 도곡리에 박원종 선생 묘 및 신도비, 별내면 청학리에 남선 선생 묘 및 신도비, 수석동에 조말생 선생 묘 및 신도비 등이 있으며, 진건읍 용정리에는 고려 말의 공신 대은 변안렬 묘역 (경기도 문화재자료, 2002년 지정) 있다.

고가옥으로는 진접읍 내곡리에 남양주 동관댁(중요민속문화재, 1984년 지정), 평내동에 남양주 궁집(중요민속문화재, 1984년 지정)이 있다. 이밖에도 수동면 지둔리에 계명주(엿탁주)(경기도 무형문화재, 1987년 지정)와 별내동에 덕릉마을 산신각(경기도 민속문화재, 1996년 지정)가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진접읍 부평리에 광릉 크낙새 서식지(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 오남읍의 남양주 양지리 향나무(천연기념물, 1970년 지정)가 유명하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조선 초기 별내면 청학리에 설립된 동봉서원(東峰書院)이 있었다. 김시습(金時習)이 수락산 기슭 폭천정사(爆泉精舍) 자리에 동봉서원을 세웠는데, 1701년(숙종 27)에 청절사(淸節祠)로 사액되었다가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될 때까지 교육과 제향의 기능을 갖추었다.

수석동에 있었던 석실서원(石室書院)은 1656년(효종 7)수석동에 건립되어 양주는 물론 경기지역을 대표하는 기호학파(畿湖學派) 사람들의 학풍을 빛낸 사립 교육기관이었다. 석실서원은 17세기 중엽 서인(西人)학파의 한 흐름을 대표하는 이단상(李端相)이 후진을 양성하던 곳으로서, 이이(李珥)를 비롯하는 기호사림의 학맥을 크게 발전시켰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 때 헐렸는데, 그 터만 남아 있다. 석실서원은 이곳 이외에도 와부읍 덕소리 석실 마을에 석실서원 묘정비가 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18년에 설립된 금곡동의 금곡보통학교이며, 그 뒤 현재의 진접읍의 장현초등학교, 화도면의 마석초등학교, 와부면의 덕소초등학교가 각각 설립되었다. 1930년대에는 별내면의 별내, 진건면의 진건, 오남면의 오남, 조안면의 조안·송촌초등학교가, 1940년대에는 광릉·답내·양정·가야가, 1950년대에는 화접·퇴계원·풍양·금남·월문·팔당 등의 초등학교가 각각 설립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62개교, 중학교 32개교, 고등학교 19개교, 특수학교 1개교가 있으며, 경복대학교 남양주 캠퍼스와 경희대학교 평화복지대학원이 있다.

1982년 개원한 남양주문화원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정약용의 학문·사상을 기리는 다산문화제를 매년 개최하면서 백일장 개최, 향토지 간행과 향토사료 수집 등에 힘쓰고 있다.

시립도서관 또한 시민의 교육과 문화발전에 힘쓰고 있으며, 한국예총 남양주지부·실내체육관 등 문화·예술단체와 체육시설이 있다.

민속

정월보름을 전후하여 여러 가지 놀이와 칠월 백중놀이를 들 수 있다. 1월 14일에는 달님에게 소원빌기와 쥐불놀이를 한다.

다북대(풀의 일종)를 아이들 나이수대로 묶은 다음 불을 붙여서 아이들 머리 위로 둘러주고 달을 향해 “다님(달님) 절합니다.”하면서 절을 세 번 하며, 새해 소망을 빌게 한다.

쥐불놀이는 정월 첫 번째 쥐날에 아이들이 논둑과 밭둑에 불을 놓던 것이 뒤에는 정월 14일 달맞이불과 합쳐져서 쥐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깡통 여기 저기에 구멍을 뚫어 양끝에 줄을 매고 그 안에 나뭇조각을 넣고 불을 붙여서 휘돌리는 놀이이다.

보름이 지나면 조금 더 놀려는 속셈에서 16일을 ‘귀신날’, 17일을 ‘작은 귀신날’이라 하여 윷놀이를 하며 논다. 칠월 백중에는 주인이 열심히 일한 머슴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새옷과 돈을 주어 하루를 즐기게 하는 백중놀이를 한다. 농민들도 모여서 씨름을 하여 장사를 가린다.

동제로는 대부분 산신제를 지내며 불암산·원구산·천마산·철마산·검암산 아래에 사는 주민들이 자연마을 단위로 모여서 동족마을 부근의 신단·신당·성황당 등을 신역(神域)으로 삼아 제를 올린다. 제일도 동족마을마다 다르며 같은 산신령을 대상으로 해도 산줄기마다 조금씩 제의에서 차이를 보인다.

진접읍 천마산의 산신제는 음력 시월상달 5일 안에 날을 잡아 그 날의 일진이 운에 맞는 사람을 제관으로 뽑고 시주·하주·패사령(잡일 하는 사람)을 뽑는다. 제물로 소를 잡아 털을 그슬리어 깨끗이 문질러 닦아 가마솥에 넣고 묵이 될 때까지 끓인다. 뼈는 추려내며 꼬리는 쓰지 않는다.

그 밖에 백설기·피·삼색과실(밤·대추·사과를 통째로 사용)·북어를 차리는데, 반찬은 비린 것은 절대로 안 쓰며 짠김치를 주로 하고 술은 현장에서 직접 만든 조리술로 하며, 떡은 시주와 하주가 아침부터 만든다. 제사는 아침부터 시작하여 오전 10시와 11시 사이에 지내고, 제가 끝나면 시주나 하주가 주민의 성명을 순서에 따라 부르면서 소지(燒紙)를 사른다.

설화·민요

이 고장은 지명유래담·이인설화(異人說話) 등과 서울과 가까운 탓으로 조선왕실과 관계된 설화가 많이 전한다. 팔야리의 지명유래담은 조선태조가 함흥에서 한양으로 환궁하는 과정에서 생긴 설화이다.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태조가 사신을 죽여가며 환궁을 거부하고 있을 때 남재(南在)가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매사냥꾼에게 함흥 주변에서 사냥하도록 하고 자신은 새끼를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암소를 타고 태상왕을 찾아가서 “벼슬에서 물러나 어떤 매사냥패를 만나 여기까지 왔다.”고 하였다.

이때 암소가 우는 소리가 나자 말 못하는 짐승도 새끼를 그려 운다고 하며 태상왕이 자책하는데, 사냥꾼들이 꿩을 안고 들어왔다. 사냥구경에 나선 태상왕은 수십 마리의 매가 꿩과 산새를 잡아채는 것을 보고 남행(南行)하는 사냥꾼을 따라 내려오다가 팔야리에 이르러 여덟 밤을 지내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삼각산이 보이자 태상왕은 속은 것을 알았으나 결국 궁궐을 짓고 눌러앉고 말았다. 그 때 매사냥을 한 산은 ‘매봉산’·‘매람산’등으로 불린다.

진접읍 금곡리의 벼락소(沼)에는 장자못 유형의 전설이 있다. 이곳에 신강역이라는 부자가 살았는데 매우 인색하여 시주온 스님에게 쇠똥을 퍼주었다. 이를 본 며느리가 쌀을 한 바가지 퍼주자 스님이 뒤돌아보지 말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뇌성벽력이 치며 폭우가 쏟아지므로 며느리는 겁이 나 뒤를 돌아보게 되어 결국 산중턱에서 돌부처가 되었고 집터는 못이 되어 지금의 벼락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벌우개[蜂峴]의 지명유래담은 자기보다 나은 이인(異人)을 만난 세조의 이야기이다. 세조는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를 구하기 위해 직접 답산을 하던 중 불길한 곳에 묘자리를 쓰고 있는 상주를 만났다.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어 300냥을 주면서 “다른 곳으로 이장하라.”하고 묘자리를 잡아준 사람을 물으니 바로 자신이 찾던 이생원이라는 지사(地師)였다. 이생원의 집에 이르러 금방 그 묘자리의 길흉을 물으니 “그 근방이 길지가 있지만 현 장지는 당장 300냥의 큰돈이 생기므로 가난한 상주에게 금시발복(今時發福)할 자리를 정해주었다.”고 하였다.

이에 감탄한 세조는 “그같이 잘 아는 사람이 왜 산골에서 이 고생을 하느냐.”고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그의 집을 보며 물으니, “국왕이 친림(親臨)하실 곳이므로 이곳에 산다.”며 짚자리를 문밖에 깔고 백배사죄하였다.

이생원의 풍수학에 놀란 세조는 그와 동행하여 광릉자리를 능자리로 정하였다. 그 뒤 광릉에 능을 파는데 그 곳에서 큰 벌이 나올 것이라 하여 주관하는 지사가 지금의 장현리 벌우개로 대피하여 큰 독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능을 파기 시작하자 곧 뒤웅박만한 벌이 쫓아와서 독을 쏘았으나 지사는 목숨을 구했으며 그 뒤 이 동네는 벌우개라고 불리었다.

이 밖에도 원수를 갚으려고 그 집 아들로 태어난 구렁이를 잡아 죽인 이인으로 진건면에 살았던 「정작(鄭碏)의 설화」, 지혜로운 아이설화인 「알동산설화」, 역사적 인물에 관한 설화 등 많은 설화가 전한다.

노동요와 비기능요인 타령류가 주류를 이루는 경기도지방의 일반적인 특징을 지닌다. 노동요 중에서는 산지가 많은 지리적 배경 때문에 밭농사 노래인 「소몰이소리」가 많다.

「소몰이소리」는 가락이 단조로우며 느리고 구성져 다른 지방의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삶은 콩을 많이 줄테니 어서 당겨라.”하는 식의 구체적인 의미를 지닌 사설이 많고 소를 모는 의미없는 감탄사적 여음이 적은 것이 특색이다.

타령류 노래로는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도일원에 널리 분포된 「창부타령」과 「상사타령」 등이 있다. 「창부타령」은 「달거리창부타령」으로 가락이 흥겹고, 매월의 명절을 열거하면서 연정을 읊은 월령체의 노래이다.

「상사타령」은 가락이 단조로우면서 느린 것이 특징으로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닐닐닐 상사디야/ 상사가 났네 상사가 났네/ 열칠팔세 먹은 처녀가/ 시집을 못가 상사가 났네/ 닐닐닐 상사디요/ 열칠팔세 먹은 총각이/ 장가를 못가 상사가 났네…….”처녀와 총각을 계속 대구형식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농부가」의 후렴인 ‘상사디야’를 ‘상사(相思)’로 전이하여 사용한 것이 특색이다.

이 밖에도 「방아타령」 등의 비기능요, 고무줄놀이에 쓰이는 동요, 상여소리 등이 있다.

산업·교통

전체 토지의 66%가 산지인 이곳은 경지가 전체 토지의 14%, 하천이 5%, 도로용지가 3%, 대지가 5%이다. 경지 중 논 29.62㎢, 밭 31.41㎢이며, 주요 농산물은 콩 등이며, 채소류로는 무·배추·상추·오이·시금치·고추·파, 서류로 고구마·감자, 과실류로 배·포도, 특용작물로 들깨·참깨 등이 생산된다.

농작물 생산량이 많은 지역은 진접읍과 진전면 지역인데 쌀은 진접읍, 밭은 진건읍, 두류는 수동면, 서류는 조안면, 과실류 중 배는 별내면에서 많이 생산된다. 산지가 많은 이곳에서는 임산자원으로 밤·잣·은행·도토리·대추 등이 생산되고 있다. 산지가 많고 대도시권에 입지한 관계로 돼지·닭·사슴·젖소 등의 목장이 경춘가도를 따라 많이 분포하고 있다.

이 밖에 화훼단지·과수단지·수목원 등이 도로를 따라 발달하고 있다. 농가 인구는 전체 인구의 2.7%인 1만 7930명이고 제조업 인구는 4.21%인 2만 7884명이다. 주요 광산물은 장석이 생산된다. 제조업은 조립금속·비금속·섬유·식료품공업·종이 인쇄업 등이 활발하다.

서울 근교에 입지한 산지지역인데다가 교통이 편리해 도시민을 위한 스키장·호텔·음식점·골프장·보트장 등 서비스업이 발달하였다. 그 중에서 국도 45호선과 국도 46호선 주변에 위락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상업 활동은 대형 마트, 상설시장, 정기시장 등이 있는데 진접읍의 장현장이 2·7일, 광릉장이 4·9일, 화도읍 마석장이 3·8일에 각각 열린다. 주요 거래품목은 채소류의 오이·상추·열무 등이다.

서울 근교에 있는 도시 중에서 국도노선이 가장 많이 지나고 있는 지역 중의 하나로 도로는 국도 6호선이 한강을 따라 동진하다 양평군으로 들어가고, 4차선으로 확장된 국도 46호선이 서남∼동북진하여 북한강을 따라 가평으로 들어가며, 퇴계원으로 들어온 국도 41호선은 진접읍을 지나 포천군으로 연결된다.

국도 6호선에서 분기한 국도 45호선은 북한강을 따라 북상하여 국도 46호선과 합류한다. 갈매동에서 47번 국도와 분기한 국도 47호선은 별내면으로 북진하다 서북진하여 의정부시로 들어간다.

철도는 중앙선이 한강을 따라 동남진하여 남한강을 따라 가고 경춘선이 국도 46호선과 평행하게 달리고 있다. 특히 최근 용산~덕소간 전철화사업이 완료되어 남양주 시민들의 교통을 원활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춘선에서 이용률이 많은 역은 금곡역이다.

관광

주요 관광명소로는 진건읍 사릉리에 춘원이 56세 때(1947) 기거했던 가옥을 들 수 있는데 이곳에서 춘원은 칩거하면서 베개모양과 비슷한 돌을 주워 이를 베개삼아 애용했다는 데서 연유된 유서 깊은 곳이다.

잦고개와 진도치고개는 진접읍 내각리와 별내면 용암리와의 경계에 위치한 고개인데, 차편이 없었던 옛날에는 동서로 연결되는 유서 깊은 고갯길이었다. 이곳은 울창한 잦나무가 하늘을 가려 대낮에도 인적이 드물어 도둑들이 우글거리던 험난한 고갯길로 알려져 있다.

와부읍 월문리에 있는 말바위, 별내면 청학지 술가산 기슭에 있는 마당바위, 진접읍 장현리의 장승마을에 있는 용소와 내가리의 알도산 등은 유명한 관광명소이다.

문화재로는 봉선사 동종·광릉·홍릉·유릉·사릉·순강원·휘경원·광해군묘·성묘·안빈묘·영빈묘·광릉 크낙새 서식처·양지리 향나무·여경구 가옥·궁집·수종사 팔각오층석탑·불암사 경판·한확선생 신도비·수종사 부도·정약용선생 묘·흥선대원군 묘·덕흥대원군 묘·수석리 토성·흥국사 대웅보전·가운동 지석묘·사당·신도비 등이 있다.

그 중 수석리 토성은 한강을 건너는 나루를 잘 지키기에 알맞도록 한강 북쪽 산봉우리 위에 축조된 백제시대의 유적으로 관광가치가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한강변 구릉지대에는 이와 비슷한 양식의 성터가 곳곳에 분포되어 있으므로 이곳에 백제 초기의 중심 취락이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어 테마여행지로 각광을 받을 전망이다. 특히, 이 성터는 백제가 한강유역을 빼앗긴 다음에 고구려와 신라에서도 중심취락지역으로 사용하다가 신라 통일 이후에 폐기되어 오늘에 이른 곳으로 추정된다.

읍·면
  1. 와부읍(瓦阜邑)

시의 서남단에 위치한 읍. 면적 49.84㎢, 인구 7만 158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덕소리이다.

본래 양주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와공면(瓦孔面)·초부면(草阜面) 17개 리의 대부분, 금촌면(金村面) 사패리(四牌里) 일부, 하도면(下道面) 맹기리(孟基里)·차산리(車山里)·백월리(白月里) 일부, 광주군 동부면(東部面)의 팔당리(八堂里) 등이 합쳐져 11개 리로 재편되면서 와공면과 초부면의 한 글자씩 따서 와부면이라 하였다.

1940년 조안·능내·진중·시우·삼봉 등 6개 리의 행정을 담당하는 조안출장소가 만들어졌다. 1980년 신설된 남양주군에 편입되었으며, 같은 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 조안출장소가 조안면으로 승격, 분리되었고 1989년 조안면 시우리 일부가 월문리로 편입되었다.

광주산맥의 줄기인 백봉(白峯, 590m)·예봉산(禮峰山, 683m) 등이 동쪽 읍계를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으며, 읍의 중앙을 흐르는 월문천(月文川)·율석천(栗石川)이 한강으로 흘러든다. 임야가 전체면적 중 70%를 넘으며, 월문천유역에 약간의 평야가 분포한다.

경지율은 15% 정도이며, 미곡 중심의 농업이 행해져 왔다. 전체면적의 80%를 초과하는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인 이유로 각종 규제가 심하나, 덕소리를 중심으로 대규모 아파트단지의 조성으로 도시화율은 급증하는 추세이다. 이에 따라 농업구조도 미곡 생산 중심에서 시설채소·시설화훼·낙농업 등 도시근교농업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조업은 덕소리를 중심으로 화학·기계·금속·전기·전자계열공업 중심의 관련 업체가 있다.

교통은 중앙선 철도가 남쪽의 하남시와 경계를 이룬 한강변을 따라 팔당·덕소역을 지나며, 이와 병행하여 6번 국도가 팔당리의 팔당대교를 통해 양평군과 연결된다. 특히 용산~덕소 간 전철화사업이 완료되면서 덕소일대가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또한 화도읍과 진접읍으로 이어지는 86번 지방도가 월문·덕소리를 지나고, 도곡리와 조안면으로 잇는 362번 지방도 등 기타 도로망이 발달했다.

문화유적은 덕소리에 석실서원(石室書院)묘정비·김상용(金尙容)선생 묘·김상헌(金尙憲)선생 묘가 있으며, 도곡리에 이맹현(李孟賢)선생 묘와 세덕사(世德祠) 등이 있다. 팔당댐 주변의 팔당유원지와 월문리의 묘적사(妙寂寺) 계곡 등은 행락객들이 많다.

덕소리(德沼里)·율석리(栗石里)·월문리(月文里)·도곡리(陶谷里)·팔당리(八堂里) 등 5개 리가 있다.

  1. 진접읍(榛接邑)

시의 북단에 위치한 읍. 면적 65.97㎢, 인구 9만 6266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장현리이다.

본래 양주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진벌면(榛伐面)·접동면(接洞面) 전체, 별비면(別非面) 5개 리, 건천면(乾川面) 양지리(陽地里) 일부가 9개 리로 통합, 개편되면서 진벌면과 접동면의 앞 글자를 따서 진접면이라 하였다.

1963년 수산리(水山里)가 수동면에 이속되는 구역 개편이 있었고, 1980년 신설된 남양주군에 속하였다. 1983년 진건면의 양지(陽地)·오남(梧南)·팔현(八賢) 등 3개 리가 편입되었고, 198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1992년 3개 리가 오남출장소로 되었다가 1995년 오남면으로 승격, 분리되었다.

서쪽의 수리봉(537m)·천견산(天見山, 393m), 동쪽의 철마산(鐵馬山, 711m), 북동쪽의 주금산(鑄錦山, 787m) 등에 둘러싸인 채 그 산세가 읍내로 뻗어 있는 산지지형이다. 읍의 중앙을 남류하는 왕숙천(王宿川)과 그 지류인 금곡천(金谷川)·진벌천(榛伐川) 유역에 약간의 평야가 있다.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전체면적의 80% 정도가 성장관리권역으로 지정될 정도로 발전잠재력이 풍부하며, 1990년 이후 시내에서 인구 증가율이 가장 높다. 장현리를 중심으로 조성된 아파트의 비율이 전체 주택 가운데 절반에 가깝다.

미곡 중심의 논농사가 중심이었으나 점차 농가수가 감소하며, 농업구조도 논농사 중심에서 원예농업과 낙농업의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이다. 제조업은 화학·철강·가구 등의 업종을 위시로 중소기업체가 다수 소재한다.

교통은 먼저 47번 국도가 퇴계원면과 포천군 내촌면을 연결, 면의 중앙을 종단하면서 내곡·장현·팔야리를 지난다. 또한 장현리에서 오남·수동면으로 연결되는 320번 지방도와 부평리에서 화도읍 금남리로 이어지는 86번 지방도가 있고 서울 시내버스가 장현리까지 연장 운행된다.

문화유적은 부평리의 봉선사 동종·광릉·휘경원·광릉 크낙새 서식지, 내각리의 순강원, 장현리의 영빈묘, 내곡리의 진접여경구가옥(榛接呂卿九家屋) 등이 있다. 또한 자연 그대로의 천연림을 자랑하는 광릉수목원(光陵水木園)은 근교 대도시 주민들의 휴식처로 각광받는다. 내각리 일대의 밤섬유원지도 잘 조성된 관광시설과 자원으로 찾는 이들이 많다.

장현리(長峴里)·내곡리(內谷里)·내각리(內閣里)·연평리(蓮坪里)·부평리(富坪里)·팔야리(八夜里)·진벌리(榛伐里)·금곡리(金谷里) 등 8개 리가 있다.

  1. 화도읍(和道邑)

시의 동쪽에 위치한 읍. 면적 71.46㎢, 인구 10만 953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마석우리이다.

본래 양주군 지역으로 상도면(上道面)과 하도면(下道面)으로 나뉘어 있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도면의 16개 리와 하도면 17개 리가 병합, 13개 리로 되어 화도면으로 개칭되었다. 1963년 지둔(芝屯)·운수(雲水)·송천(松川) 등 3개 리가 수동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신설된 남양주군에 편입되었으며, 1991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읍의 북쪽은 천마산(天摩山, 812m)·송라산(494m)·두리봉(378m), 서쪽은 백봉, 남쪽은 문안산(文案山, 536m) 등이 솟아 있으며, 동쪽에는 양평군과 경계를 이루는 북한강이 남류한다.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이나, 동쪽에 신기천(新基川)·월산천(月山川)이 북한강에 유입되며, 중앙을 흐르는 묵현천(墨峴川)과 월산천 유역에 좁은 평야가 길게 펼쳐져 있다. 읍 전체가 자연보전권역으로 설정되었으나, 마석우리를 중심으로 개발이 활발하다. 이에 따라 인구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지역의 특성이 점차 농촌지역에서 도시형태로 바뀌고 있다.

미곡생산 중심이었으나 점차 생산량이 감소되는 추세다. 원예농업과 낙농업의 비중이 커지고 있는데, 특히 양계는 시내 제1위이다. 제조업은 화학·전기·전자·식품 등의 업종과 관련된 업체가 많다.

교통은 경춘선 철도가 마석역을 지나며, 이와 병행하여 46번 국도가 읍의 중앙을 횡단하면서 묵현리를 거쳐 구암리를 지난다. 또한 와부읍과 양평군 서종면으로 연결되는 86번 지방도가 차산·창현·금남리를 지나며, 와부읍과 수동면으로 이어지는 362번 지방도가 읍의 중앙을 종단한다.

문화유적은 창현리에 흥선대원군 묘, 차산리에 이순지선생 묘가 있다. 묵현리의 천마산 심신수련장·천마산 스키장, 금남리의 강변 유원지·새터 유원지 등은 수도권 시민들이 즐겨찾는 휴식공간으로 유명하다.

마석우리(磨石隅里)·묵현리(墨峴里)·녹촌리(鹿村里)·창현리(倉峴里)·차산리(車山里)·금남리(琴南里)·가곡리(嘉谷里)·구암리(九巖里)·답내리(畓內里)·월산리(月山里) 등 10개 리가 있다.

  1. 진건읍(眞乾邑)

시의 서쪽에 위치한 읍. 면적 32.59㎢, 인구 2만 7605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용정리이다.

본래 양주군 지역으로 구한 말까지 대부분이 진관면(眞官面)과 건천면(乾川面)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진관면의 7개 리와 건천면 13개 리, 접동면(接洞面) 중포(中浦)·와촌(瓦村) 일부, 미음면(渼陰面) 도농(陶農) 일부가 9개 리로 통폐합되면서 진건면이라 개칭되었다. 1936년 면사무소를 사능리에서 현재의 용정리로 이전하였다. 1980년 신설된 남양주군으로 행정관할권이 넘어갔다. 1983년 양지(陽地)·오남(梧南)·팔현(八賢) 등 3개 리가 진접면에 이속되었다. 2001년 9월 12일 읍으로 승격되었다.

산지는 대체로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세이나 면 중앙의 문재산(文嶺山, 156m) 정도를 제외하고는 높은 산이 없다. 면의 북부지역에 용정천(龍井川), 남부지역에 사릉천(思陵川)이 흐르며, 그 주변에 평야가 발달해 있다.

전체면적의 약 70%가 개발제한구역이나, 서울 외곽의 전원주거지로 성장가능성이 높아 급속히 인구가 늘고 있다. 택지개발로 농경지가 점차 감소하나 전체면적 중 농경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편에 속하며, 밭농사에 비해 논농사의 비율이 높다.

시내에서 쌀의 생산량이 가장 많은 지역이며, 시설채소와 원예 등의 근교농업도 성행한다. 또한 한우·젖소·돼지·사슴·오리 등의 사육이 이루어지며, 특히 한우사육이 시내 제1위이다.

교통은 경춘선 철도가 사능역을 지나고 서울~포천 간을 연결하는 47번 국도가 진관리를 경유한다. 또한 퇴계원면에서 금곡동으로 연결되는 390번 지방도와 지금동으로 연결되는 391번 지방도, 진접읍과 양정동으로 연결되는 86번 지방도 등 사방으로 뻗은 도로망에다 서울 시내버스가 사릉리까지 연장 운행된다.

문화유적은 송릉리에 광해군 묘·안빈 묘(安嬪墓), 사릉리에는 단종(端宗)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의 능인 사릉(思陵)이 있다.

용정리(龍井里)·사릉리(思陵里)·배양리(培養里)·진관리(眞官里)·신월리(新月里)·송릉리(松陵里) 등 6개 리가 있다.

  1. 오남읍(梧南邑)

시의 중북부에 위치한 읍. 면적 25.25㎢, 인구 5만 5255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양지리이다.

본래 양주군 지역으로 조선시대 이래 건천면(乾川面) 지역에 해당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진관면·건천면 전체와 접동면(接洞面)·미음면(渼陰面) 일부가 통합되어, 9개 리로 재편된 진건면이 신설될 때 3개 리를 관할하였다. 이 때 건천면 팔현리가 팔현리로, 건천면 어남상(於南上)·어남하(於南下)·오산(梧山)와 단곡(丹谷) 일부가 오남리로, 건천면 양지리·단곡리 일부와 접동면 중포(中浦) 각 일부가 양지리로 통폐합되는 구역 개편이 있었다.

1980년 남양주군이 신설될 당시에도 진건면에 속했다가, 1983년 진접면에 편입되었다. 1992년 진접읍 오남출장소가 개설되었으며, 1995년 진접읍에서 분리되어 면으로 승격되었다. 2001년 9월 21일 읍으로 승격되었다.

북쪽의 철마산과 남동쪽 천마산의 여맥이 면내로 이어져 구릉성 산지를 형성하며, 진건천과 오남천이 면의 중앙을 흐른다.

농업이 주요 산업기반이나 대규모 아파트단지의 조성으로 농가호수와 농경지가 격감하고 있으며, 농업구조 또한 논농사 위주에서 시설원예와 낙농업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교통은 먼저 진접읍과 수동면으로 연결되는 320번 지방도가 면의 중앙을 횡단한다. 그 밖에 진건읍 사능리에서 진접읍 장현리를 연결하는 7번 군도가 오남리와 양지리를 지나며, 팔현리에서 수동면을 잇는 14번 군도가 있다. 문화유적은 양지리에 천연기념물인 향나무가 있다.

양지리(陽地里)·오남리(梧南里)·팔현리(八賢里) 등 3개 리가 있다.

  1. 별내면(別內面)

시의 서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22.15㎢, 인구 2만 1429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광전리이다.

본래 양주군 지역으로 조선시대 이래 별비면(別非面) 지역의 대부분을 이루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별비면의 19개 리 가운데 15개 리, 내동면(內洞面) 입암(笠巖)·고산(高山)·산곡(山谷), 노원면(蘆原面) 불암(佛巖), 진관면(眞官面) 본진관(本眞官) 일부가 8개 리로 통폐합되면서 별비면과 내동면의 앞글자를 따서 별내면으로 개칭되었다. 1966년 퇴계원리에 퇴계원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0년 신설된 남양주군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퇴계원출장소가 퇴계원면으로 승격, 분리되었다. 1989년 퇴계원 출장소가 퇴계원면으로 승격, 분리되었고, 2012년 덕송1~2리와 화접1~7리가 별내동으로 분리·신설되었다.

서쪽에는 수락산(水落山, 638m)·불암산(佛巖山, 508m), 북쪽에는 수리봉(537m), 동쪽에는 옛성산(288m)·퇴뫼산(364m) 등 산지가 많은 곳이다. 남부의 용암천(龍巖川)·덕송천(德松川)·불암천(佛巖川) 부근에 약간의 평야가 있을 뿐이다. 서울의 동북부와 의정부의 남부를 잇는 관문으로 성장관리권역으로 지정되었으나, 전체면적의 대부분이 개발제한구역이자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되어 있다.

농업은 도시근교의 성격을 잘 활용하여 원예농업이 활발하고, 제조업은 제지·벽돌 및 콘크리트타일 등을 주로 한다.

교통은 퇴계원면과 의정부시를 연결하는 43번 국도가 면의 동쪽에서 북서지역을 종단하고, 1·2·4·8번 군도가 남부와 북부지역의 수송을 담당한다.

관광자원으로는 청학리의 수락산등은 수도권 주변에 널리 알려진 곳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많은 등산객을 맞고 있다.

청학리(靑鶴里)·용암리(龍巖里)·광전리(廣田里) 등 3개 리가 있다.

  1. 수동면 水洞面

시의 동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77.72㎢, 인구 8,88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운수리이다.

구한말까지 양주군 상도면(上道面)의 8개 리와 진벌면(榛伐面) 수막동(水幕洞)·내마산리(內馬山里), 가평군 외서면(外西面)의 6개 리로 분리되어 있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화도면의 3개 리, 진접면의 1개 리, 가평군 외서면의 3개 리를 관할하였다. 1963년 화도면의 지둔리·운수리·송천리, 가평군 외서면의 입석리·외방리·내방리, 그리고 진접면의 수산리가 병합되어 수동면이 만들어졌다. 1980년 신설된 남양주군에 편입되었다.

북쪽으로 가평군과의 경계에 있는 주금산(鑄錦山, 813m)을 정점으로, 서쪽에 철마산(鐵馬山, 711m), 북동쪽에 서리산(825m)·축령산(祝靈山, 879m), 남부에 송라산(494m) 등 비교적 높은 산이 면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그 중앙을 외방천·지둔천·수산천 등이 구운천(九雲川)에 합류, 남류하다가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상수원수질보전 특별대책지역으로 농경지가 협소하고 소득원이 빈약한 개발낙후지역이다.

미곡 생산량은 저조한 반면에 특용작물인 잎담배와 산악지대를 이용한 약재의 생산량이 많으며, 양계·양잠업 등도 성하다.

교통은 화도읍 마석우리와 가평군 상면으로 이어지는 362번 지방도가 남부에서 북쪽으로 면을 종단하는 가운데 14번 군도와 연결되며, 기타 남부와 중앙에 도로망이 있다. 지둔리에 지역 특산주인 계명주(鷄鳴酒)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내방리·수산리 일대는 수동국민관광지이며 굽이쳐 흐르는 수동계곡은 휴양지이다.

운수리(雲水里)·송천리(松川里)·지둔리(芝屯里)·수산리(水山里)·입석리(立石里)·외방리(外坊里)·내방리(內坊里) 등 7개 리가 있다.

  1. 조안면(鳥安面)

시의 남쪽에 위치한 면. 면적 50.69㎢, 인구 4,33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조안리이다.

본래 대부분이 양주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와공면(瓦孔面)·초부면(草阜面) 17개 리와 대부분, 금촌면(金村面) 사패(四牌) 일부, 하도면(下道面) 맹기(孟基)·차산(車山)·백월(白月) 일부, 광주군 동부면(東部面)의 팔당(八堂) 등을 합쳐져 11개 리로 재편되면서 와공면과 초부면의 한글자씩을 따서 와부면이라 하였다. 이때 신설된 와부면의 6개 리를 관할하였다.

1940년 조안출장소가 설치되어 와부면의 조안·능내·진중·시우·송촌·삼봉 등 6개 리를 관할하였다. 1980년 남양주군이 신설됨에 따라 이곳으로 행정권이 이양되었으며, 1986년 조안출장소가 조안면으로 승격, 와부면에서 분리되었다. 1989년 시우리 일부가 와부읍에 편입되었다.

서쪽에 예봉산(禮峰山, 683m)·적갑산(赤甲山, 561m), 중앙에는 운길산(雲吉山, 610m) 등이 솟아 있는 서고동저형이다. 동쪽으로는 북한강이 양평군과의 경계를 이루면서 남류하다가 능내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하여 북서쪽으로 흐른다.

면 전체가 대부분 산지이며, 북한강으로 흘러드는 조안천(鳥安川)과 진중천(鎭中川) 유역에 소규모의 평지가 있다. 임야가 전체면적의 70%를 넘는 관계로 농경지의 비율은 낮은 편이며, 시 전체에서 세대수와 인구수가 제일 적은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이며, 한우와 젖소 등의 사육도 활발하다. 또한, 농가소득의 증대를 위해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시설채소재배와 원예 등의 근교농업이 활발하다. 능내리와 하남시에 걸친 팔당댐의 건설로 대부분의 지역이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개발제한 규제가 심하다.

교통은 서울~양평 간을 연결하는 6번 국도가 한강변을 따라 능내·조안리를 지나고, 이와 병행하여 중앙선 철도가 운길산역을 통과한다. 또한 화도읍으로 연결되는 45번 국도가 북한강변을 따라 면의 동부를 종단하며, 10·12번 군도가 45번 국도와 연결되어 면의 북부 지역과 중앙을 횡으로 연결한다.

문화유적은 능내리에 정약용의 묘와 한확선생 신도비(韓確先生神道碑), 송촌리에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양주 수종사 부도, 시우리에 류량(柳亮)선생 묘가 있다. 팔당호와 북한강 주변에는 수려한 경관과 더불어 낚시·수상스키·보트놀이 등의 위락시설들이 갖추어져 있다.

조안리(鳥安里)·능내리(陵內里)·진중리(鎭中里)·송촌리(松村里)·삼봉리(三峯里)·시우리(時雨里) 등 6개 리가 있다.

  1. 퇴계원면(退溪院面)

시의 서쪽에 위치한 면. 면적 3.26㎢, 인구 3만 262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퇴계원리이다.

본래 양주군 지역으로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는 별비면(別非面) 지역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별비면 전체와 내동면 3개 리가 합쳐져, 8개 리로 구성된 별내면(別內面)의 1개 리에 해당하였다. 이때 퇴계원리는 별비변의 퇴계원리·전도리(全道里) 일부와 진관면(眞官面) 본진관리(本眞官里) 일부가 포함된 것이었다. 1966년 별내면 퇴계원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89년 면으로 승격되었다.

전국 최소면적의 면이면서 인구밀집지역이다. 도시화의 진전속도가 매우 빠르고, 서울과 수도권 북부지역의 도시들에 생활기반을 둔 주민들이 많은 관계로 인구유동성이 높다. 동쪽 왕숙천 유역의 소규모 농경지에서 농산물이 산출되나 양은 미미하다.

경춘선 철도가 퇴계원역을 지나고, 구리시 인창동과 별내면 청학리를 연결하는 43번 국도와 서울시 중랑구와 진접읍 팔야리를 잇는 47번 국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공동생활권인 서울의 시내버스가 연장 운행된다.

퇴계원리(退溪院里) 1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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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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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안내문안집』 Ⅰ·Ⅱ(경기도, 1997)
『시정백서』(남양주시, 1997)
『지방행정구역요람』(내무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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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지명유래집』(경기도, 1987)
『한국행정제도사』(정시채, 법문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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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지』(경기도지편찬위원회, 1955·1956·1957)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
남양주시(www.nyj.go.kr)
구리남양주교육청(www.goeg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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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조춘용·이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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