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석(君奭), 호는 낙전당(樂全堂)·동회거사(東淮居士). 우참찬 신영(申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성도사 신승서(申承緖)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신흠(申欽)이다. 어머니는 병마절도사 이제신(李濟臣)의 딸이다. 선조의 부마(駙馬)이다.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때의 척화오신(斥和五臣)의 한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올랐으며 1606년(선조 39)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되었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가 추방되어 쫓겨났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재등용되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3궁(宮)을 호위(扈衛)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호종하여 끝까지 성을 지켜 청군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주화파(主和派) 대신들이 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자고 하자, 칼을 뽑아 대신들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호종의 공으로 재상과 같은 예우를 받고, 1638년에는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제수했으나 사퇴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뒤 삼전도비사자관(三田渡碑寫字官)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부, 사퇴하였다.
1642년 명나라와 밀무역을 하다 청나라로 잡혀간 선천부사 이계(李烓)가 조선이 명나라를 지지하고 청나라를 배척한다고 고하여, 최명길(崔鳴吉)·김상헌(金尙憲)·이경여(李敬輿) 등과 함께 심양(瀋陽)에 붙잡혀가 억류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주선으로 풀려나와 귀국한 뒤 시·서로써 세월을 보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문장·시·서에 뛰어났으며, 특히 김상용(金尙容)과 더불어 전서의 대가였다.
글씨로는 회양의 「청허당휴정대사비(淸虛堂休靜大師碑)」, 광주(廣州)의 「영창대군의비(永昌大君碑)」, 파주의 「율곡이이비(栗谷李珥碑)」 등이 있다.
저서로는 『낙전당집樂全堂集)』·『낙전당귀전록(樂全堂歸田錄)』·『청백당일기(靑白堂日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