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전투 ()

목차
관련 정보
부산 송공단
부산 송공단
조선시대사
사건
1592년(선조 25) 4월 15일 송상현 등이 경상도 동래에서 일본군과의 싸운 전투.
목차
정의
1592년(선조 25) 4월 15일 송상현 등이 경상도 동래에서 일본군과의 싸운 전투.
개설

동래전투는 1592년(선조 25) 4월 15일 동래성을 지키던 조선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함락당한 전투이다.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을 중심으로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등과 수많은 군사·백성이 전사하였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이 싸움에서 3천여 명 이상이 전사하고 50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경과

1592년(선조 25) 4월 14일 부산진성(釜山鎭城)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4월 15일 동래성에 침입하였다. 이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은 동래성의 백성과 운명을 같이할 것을 결의하고 그들을 모두 불러들여 성을 지키기로 결의하였다.

적군은 3대(隊)로 나누어 1대는 성의 동쪽으로 우회하고, 1대는 성 서쪽으로 나아가며, 주력부대는 남문 앞에 집결하였다. 포위망을 구축한 일본군은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나무판을 세우고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못하겠으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크게 써서 성 밖에 세워놓고 항복을 권유하였다. 이에 송상현은 목판에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써서 그들에게 보임으로써 결사항전의 투지를 밝혔다.

이처럼 회유가 거부당하자 전면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이 3중으로 성을 포위한 뒤 1대가 뒷산으로 성을 우회하여 경사진 산 중턱의 성벽을 넘어 함성을 지르며 난입하자, 성안은 혼란에 빠지면서 대접전이 벌어졌다. 우리 측 군사는 물론, 무기를 채 가지지 못한 동래성의 백성들까지도 모두 싸움에 참가하였다.

결과

중군(中軍)을 비롯한 막료군관, 양산군수 조영규는 송상현과 함께 독전(督戰)하면서 끝까지 싸웠지만, 병력과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적의 무차별 살육에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전사하였다. 마침내 동래성이 함락되었으며, 부사 송상현도 그 자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충렬사지(忠烈祠誌)』
『징비록(懲毖錄)』
『노봉집(老峰集)』
덴케이[天荊], 『서정일기(西征日記)』 (일본:국서간행회(國書刊行會), 1907)
『천곡 송상현 선생의 삶과 추숭』(조영임, 2013)
『부산시지』(부산시편, 1974)
「동래성전투에 대한 기억서사와 표상-공간의 형성과정 연구」(전송희, 『민족문학사연구』53, 2013)
「조선후기 ‘충렬공 송상현 서사’의 사회문화적 성격」(오인택, 『역사와 세계』 40, 2011)
「임진왜란시의 부산지구전투」(정중환, 『군사』 2, 1981)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김석희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