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규

  • 역사
  • 인물
  • 조선 전기
조선시대 용천부사, 양산군수 등을 역임한 무신.
이칭
  • 옥첨(玉瞻)
인물/전통 인물
  • 관련 사건동래성전투|임진왜란
  • 본관직산(稷山)
  • 사망 연도1592년(선조 25)
  • 성별남성
  • 주요 관직양산군수
  • 출생 연도미상
  • 출생지장성(長城)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이문기 (경산대학,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조영규 정려 미디어 정보

조영규 정려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시대 용천부사, 양산군수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본관은 직산(稷山). 자는 옥첨(玉瞻). 장성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무과를 거쳐 환로에 나아가 용천부사를 역임하고 양산군수가 되었다. 양산군수로 재임 중이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의 선봉이 부산·동래성을 공격하자 경상우병사 이각(李珏)은 군사를 버리고 도망쳤으나, 조영규는 오히려 말을 달려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찾아가 생사를 같이하기로 기약하였다.

당시 조영규의 노모가 임소인 양산에 있었으므로 다시 양산으로 돌아와 노모와 작별하고 동래성으로 갔다. 이미 왜병이 동래성을 포위하고 있었지만, 단기(單騎)로 돌진하여 적진을 통과, 성내로 들어가 왜병과 끝까지 싸웠다. 성이 함락당하자 송상현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1669년(현종 10) 송준길(宋浚吉)의 상계로 조영규의 효행과 충절이 알려져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동래의 안락서원(安樂書院), 양산의 충렬사(忠烈祠), 장성의 모암서원(慕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 - 『현종실록(顯宗實錄)』

  • - 『청선고(淸選考)』

  • - 『장성읍지(長城邑誌)』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