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지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아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항쟁한 의병장.
이칭
희문(希文)
경재(敬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627년(인조 5)
본관
수안(遂安)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아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항쟁한 의병장.
개설

본관은 수안(遂安). 자는 희문(希文), 호는 경재(敬齋). 아버지는 계형원(桂馨遠)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천성이 충후(忠厚)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군사가 향리인 선천을 위협하자, 아들 계천상(桂天祥) · 계익상(桂益祥)과 더불어 의병 수백명을 모집하고 군량과 병기를 모아 사포(沙浦)의 강안(江岸)에 주둔하여 적을 기다렸다.

오랑캐 수백기(數百騎)가 공격하여오자 배수진을 치고 매복전술을 이용하여 싸워 크게 이기고 물러나 고령포(古嶺浦)에 진을 쳤다. 다음날 새벽 적병 대군이 다시 공격해오자 종일토록 힘껏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아들 계천상은 포로로 잡혀 항복하기를 종용받고 모진 형벌에 처하여졌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으며, 결국 석방되어 송환되었다. 1682년(숙종 8) 조정에서 그 공훈을 기려 정려를 세워주었다.

참고문헌

『선천읍지(宣川邑誌)』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