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평양직할시 중구역에 위치한 묘정비(廟庭碑)로, 1637년(인조 15) 평양 숭인전에 세워졌다.
규장각 도서에 있는 이 비의 탁본첩을 보면, 1첩으로 7절 14면이 호접장(蝴蝶裝) 형식으로 제책되어 있으며, 서체는 조맹부체(趙孟頫體)이다. 크기는 가로 19.2㎝, 세로 31.4㎝이고 ‘東華世家(동화세가)’라 새긴 도장이 찍혀 있다.
숭인전은 1325년(충숙왕 12)에 기자(箕子)를 모시기 위하여 왕명으로 세워진 사묘(祠廟)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 세종은 이곳에 사액(賜額)을 하고 변계량(卞季良)으로 하여금 비수지사(碑樹之詞)를 지어 보내도록 하였으며, 관원을 두어 대대로 직무를 이행하게 하였다.
그 후 광해군 집정기에 예조판서 이정구(李廷龜)는 왕에게 평양의 기자사묘에 숭인전이라는 전호(殿號)를 내릴 것과 전감(殿監)을 두어 선우씨(鮮于氏) 성을 가진 사람을 뽑아 그 임무를 맡기고 그를 병역면제시킬 것을 건의하여 허락을 얻었으며, 1613년(광해군 5) 스스로 숭인전의 비문을 완성하였다.
이 비문은 당대의 명필가인 김현성(金玄成)이 쓰고, 전액(篆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는데, 비가 세워진 것은 그로부터 24년 후인 1637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