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귤동 마을 만덕산 중턱에 위치한다. 일명 ‘다산초당’으로 알려진 이곳은 11년간 유배되어 많은 책을 저술한 곳이며, 1963년 1월 21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신유박해(辛酉迫害) 당시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 유배되어 18년간의 유배생활을 치르던 중 11년간을 보내던 곳으로, 흔히 ‘다산초당(茶山艸堂)’이라고 불린다.
정약용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경세학(經世學)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도암면 귤동(橘洞) 마을의 만덕산 중턱에 자리 잡아 강진만을 한눈에 굽어보는 이 초당은 원래 귤림처사(橘林處士) 윤단(尹慱)이 세운 산간정자였다. 윤단은 정약용의 외증조부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자로서, 정약용에게 학문을 닦는 공간으로 이곳을 내주었다. 정약용은 윤단의 아들 윤규로(尹奎魯)의 도움을 받아 공간 전체를 다듬어 공부와 저술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꾸었다.
지금의 건물은 원래 초가였던 것을 1958년 강진의 다산유적보존회가 옛터의 주춧돌 위에 기와집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이후 1970년, 1971년, 1975년 3차례에 걸쳐 보수공사를 하였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인 단층기와집으로 뒤쪽이 방이며 앞쪽으로 마루가 있는 남향집이다. 처마 밑에는 원래의 현판은 없고 뒤에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다산초당(茶山艸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초당을 중심으로 앞마당에는 차를 끓이던 청석자연암(靑石自然巖)의 다조(茶袍)가 있고, 뒤쪽 벼랑에 ‘정석(丁石)’이라는 두 글자를 친필로 새긴 석각, 초당 뒤편의 샘물인 약천(藥泉), 그리고 초당 옆의 연못 등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후대인들이 이 네 가지의 승경을 ‘다산사경(茶山四景)’이라고 부른다.
또, 초당의 좌우에는 약간의 공간을 두고 동암과 서암이라는 서재가 있어 유배생활 당시 다산의 학문탐구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