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조선 후기, 「자화상」, 「채애도」, 「오성도」 등을 그린 문인화가.
가계 및 인적사항
주요 활동
윤두서는 1696년에 이영창사건(李榮昌事件)에 휘말려 고초를 겪었는데, 이를 기점으로 학술과 예술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1700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세마도(洗馬圖)」, 「석양수조도(夕陽垂釣圖)」 등의 풍속화를 그렸다. 1710년에 세상을 떠난 6촌 아우 심득경(沈得經)의 가족을 위해 초상을 그려 뛰어난 묘사력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圖)」와 「일본여도(日本輿圖)」를 제작할 만큼 지도에 대한 관심도 가지고 있었다. 1713년에 한양 생활을 청산하고 해남으로 돌아갔는데, 이 이사는 그가 구축했던 서울 지식인들과의 인맥, 학문적 · 예술적 네트워크를 상실하는 일이었다. 해남으로 낙향한 윤두서는 선세(先世)의 유묵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모사하거나 첩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서총대친림연회도(瑞蔥臺親臨宴會圖)」가 그 대표적인 사례인데, 1560년에 명종이 신하들과 창덕궁 후원에 행차하여 열었던 연회를 그린 것이다. 그림이 낡은 바람에 윤두서가 이모(移模)하고, 그의 아들 윤덕희(尹德熙)가 표제를 썼다.
학문과 저술
서법에서도 17세기 이후 근기 남인들이 추종했던 허목의 글씨와 그 지향을 따랐다. 그의 주변에는 이서, 윤순(尹淳)과 같이 조선시대 서예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서예가들이 있었으며, 상고시대의 순박함을 지향하였다. 회화의 경우, 전통적인 화법을 중시하여 관념산수화를 제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실경산수화도 남겼다.
저서로 『기졸(記拙)』과 『화단(畵斷)』, 주요 작품으로 「석양수조도」, 「세마도」, 「채애도(採艾圖)」, 「오성도」, 「자화상(自畵像)」, 「심득경초상」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원전
- 『해남윤씨세보(海南尹氏世譜)』
- 『기졸(記拙)』
- 『화단(畵斷)』
- 『청죽잡지(靑竹雜識)』
- 『병와집(甁窩集)』
단행본
- 차미애, 『공재 윤두서 일가의 회화』(사회평론, 2014)
- 박은순, 『공재 윤두서: 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선구자』(돌베개, 2010)
- 이내옥, 『공재 윤두서』(시공사, 2003)
논문
- 차미애, 「공재 윤두서 일가의 회화 연구」(홍익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0)
- 이완우, 「남 녹우당 소장 서예자료의 검토」(『해남 녹우당의 고문헌』, 태학사, 2003)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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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조선 시대에, 남인(南人) 가운데 허목(許穆)을 영수로 한 분파. 숙종 때 복제(服制) 문제로 세력을 잡은 뒤 서인의 죄를 엄하게 다루자고 주장하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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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두 번째 부인 완산 이씨는 이형징의 딸이자 이형상의 양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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