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서(仲舒), 호는 식산(息山).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이관징(李觀徵), 아버지는 예조참판 이옥(李沃)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승지 이동규(李同揆)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학문을 전수받았고, 지취(志趣)가 고상하였으며, 정주학(程朱學)에 심취하였다.
1678년(숙종 4) 15세 때 송시열(宋時烈)의 극형을 주장하다가 탁남(濁南)에게 몰려 북청(北靑)에 유배된 아버지를 따라가 그곳에서 여러 해 동안 시봉하며 학문을 닦았다. 그 뒤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왔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오직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만부는 누대(累代)를 서울에서 살았으나 영남의 학자들과 친분이 있는 관계로 그곳에 이거(移居)하여 후진 양성과 풍속교화에 힘쓰며 저술활동을 하였다. 1729년(영조 5) 학행(學行)으로 장릉참봉(長陵參奉)과 빙고별제(氷庫別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이만부는 평소에 주염계(周濂溪)·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장횡거(張橫渠)·주자(朱子) 등 5현(賢)의 진상(眞像)을 벽에 걸고 존모하였으며, 이황(李滉)을 정주학의 적전(嫡傳)으로 존숭하였다. 따라서, 성리학적인 견해도 주리적(主理的)인 경향을 보인다.
만년에는 역학(易學)에 관해서도 깊이 연구하였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로 문집인 『식산문집(息山文集)』 20책 외에 『역통(易統)』 3권, 『대상편람(大象便覽)』 1권, 『사서강목(四書講目)』 4권, 『도동편(道東編)』 9권, 『노여론(魯餘論)』 1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