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중옥(仲玉), 호는 서암(西巖).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이었으며, 첨정(僉正)을 지냈다. 1763년에서 이듬해까지 통신 사행(通信使行)의 수행 화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한객인상필화(韓客人相筆話)」에 의하면 일본 사행 중의 그는 골격이 풍만하고 잘생겼으나 병이 있었다고 했으며, 희망은 부귀를 누리는 것과 득남(得男)이었다고 한다.
통신사행 중에 일본 남화(南畵)의 대가인 이케노 타이가(池大雅)로부터 화법(畵法)에 대한 질문의 편지를 받기도 하였다. 유작은 국내에 10여 점, 일본에 9점 가량 전하고 있다. 일본에 남아 있는 작품들이 격조가 높은 편이다. 특히 짙고 옅은 먹을 변화 있고 능숙하게 처리한 일본 개인 소장의 「산수도」의 경우, 남종화법을 토대로 발전된 그의 뛰어난 기량을 잘 보여 준다.
사행 당시 기요미지(淸見寺) 주지의 요청에 의하여 그곳에 그려 놓고 온 「금강산도(金剛山圖)」(1764년)와 「낙산사도(洛山寺圖)」(1764년) 등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들은 당시 한․일간 회화 교섭의 실상을 추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선과 심사정(沈師正)의 영향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남종화풍의 발전에 세련미를 더해 주었다. 그리고 정선파(鄭敾派)의 진경산수화풍이 일본 화단에 전해지는 데 이바지한 바 크다. 이밖에 그의 대표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사계산수도(四季山水圖)」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