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중옥(仲玉), 호는 서암(西巖)이다.
1757년에 수종화사(隨從畵師)로서 장경주(張敬周)를 도와 어진을 중수했고, 1760년경까지 도화서 사과(司果)를 지냈다. 1775년에는 위도의 첨사를 제수받기도 했다.
김유성의 활동 중 특히 시선을 끄는 부분은 일본에서의 활동이다. 그는 1763년 조엄(趙曮)의 통신사행에 절충장군직으로 수행했는데, 이때 일본의 지식인들과 두루 교유하며 주1 정사 조엄의 요구에 따라 일본인들의 요청에 응한 작업을 담당했으며, 일본 지도 개정본을 모사하기도 했다. 사적인 만남에서도 일본인들과 필담이나 수창(酬唱)을 함으로써 깊은 인상을 남겼다. 기무라 겐카도[木村蒹葭堂]가 자신의 『겸가당갑신고(蒹葭堂甲申稿)』에 남긴 찬사가 대표적이다.
1764년 봄에는 에도에서 청나라 출신 화가와 그림을 포함한 예물을 교환하기도 했는데, 이때 일본에 남은 김유성의 산수화들이 당시에 유행한 판화집에 포함되기도 했다. 그 밖에도 다수의 일본 지식인과 교분을 형성하였고, 일본인들은 김유성을 역대 화가들에 비견하면서 높이 평가했다.
현재 일본에는 김유성의 작품이 14점가량 전하는데 화목은 다양하다. 그중에 조엄의 추천으로 그린 「금강산도」가 있는데, 전형적인 정선의 금강산 그림 양식으로 그린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