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분성(盆城)이고, 자는 성원(聲遠), 호는 춘방(春舫)이다. 30대까지 초명 종대(鍾大)를 썼다.
1863년부터 10여 년 동안 칠송정시사(七松亭詩社)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지었던 시들의 일부가 여항시선집인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실렸다. 칠송정시사에서 함께 활동했던 여항 주1 오횡묵(吳宖默),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간송(磵松) 서만보(徐晩輔)와 교유했다. 특히 서만보는 그에게서 그림을 얻기도 했고, 시서화 '삼절(三絶)'로 여기기도 했다.
화가로서 행적은 1887년경부터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시기부터 광통교에서 육교화방을 운영하던 장승업(張承業)과 교류를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장승업의 작품에 제화시와 관지를 남기기도 했다. 관향이 같은 북산(北山) 김수철(金秀哲)의 작품에도 김영의 제시가 있어 두 사람의 교유를 짐작할 수 있다.
김영 자신도 산수, 화훼영모(花卉翎毛), 사군자, 괴석, 기명절지(器皿折枝), 책가도(冊架圖) 등 거의 모든 화목을 다룰 줄 알았다. 화풍은 당시의 조선 화단이 수용한 청대 회화의 전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산수화는 청대 정통파의 전형을 따르고, 화훼영모화도 세련된 색감을 보인다.
한편, 기명절지와 책가도를 제작한 점은 그가 대중 예술의 유행에도 적응했음을 보여준다. 「산수십곡병풍(山水十曲屛風)」, 「우후산수도(雨後山水圖)」 등의 작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