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은 1915년과 1918년 두 차례에 걸친 이승만과의 분쟁으로 그 동안 주도권을 갖고 활동하였던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다. 이에 새로운 세력규합의 필요성을 느껴서 설립한 단체가 바로 갈리리연합회이다.
연합회가 결성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1918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재정을 불분명하게 처리하였다는 박용만 측의 고소로 하와이 법정에 서게 된 이승만이 법정에서 재판결과를 유리하게 이끌려고 박용만의 무력적인 항일독립운동 경력을 비난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당시 미국과 일본은 서로 연합하여 대독전쟁(對獨戰爭)을 승리로 이끌고자 상호협조적인 분위기였다. 이를 간파한 이승만이 재판결과를 유리하게 만들고자 1914년 설립한 국민군단의 항일군사활동을 꺼내어 시시비비를 제기하자 박용만은 그의 행위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였다.
즉, 박용만은 1918년 3월 장문의 「시국소감」에서 “재판석에서 국민군단의 항일운동이 죄이고 국제평화의 소란을 음모하는 것이니 조처하라고 호소한 것은 우리 동포의 애국정신을 변천시키고 독립운동을 음해하는 악독한 행동이다.”라고 지적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자기의 조그만 지위를 보존하려고 동포들이 서로 충돌하여 망운을 초래하게 하는 행동이다.”라고 통탄하였다.
「시국소감」을 발표한 박용만은 마침내 27명의 발기인을 중심으로 갈릴리연합회를 조직하였다. 발기인으로 참가한 인물은 박용만을 비롯하여 안영칠·차병수·김현구·유동면·이경호·김한근·김진호·임창진·정국선·김난수·이철연·이강열·이내수·정병섭·신흥균·정두옥·이정근·노병식·송진언·이종홍·이춘서·마준영·이순화·주원여·김규섭·박여규 등이다.
발기인으로 참가한 이들은 주로 과거에 박용만이 설립한 대조선국민군단에 참가하였던 인물들이었다. 갈릴리연합회는 발기문에서 “사회의 공리를 밝히자는 것이 풍파가 되고 경위를 분석할수록 분경이 일어난즉 우리가 싸움을 하느니보다 그들의 행사를 관심하지 말고 사회부흥에 노력하려는 성심으로 이 단체를 조직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번에 조직되는 연합회는 한인들 간의 충돌 방지와 한인사회의 시비 정돈, 그리고 동포 간의 융화 증진을 목적으로 하여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질서가 정돈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될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한시적인 단체로 출발하려 한 갈릴리연합회는 기존의 대한인국민회 세력과 완전한 분립을 시도하여 1918년 11월 28일『태평양시사(The Korean Pacific Tims)』를 기관지로 발간하는 등 독자노선을 고수하였다.
이에 따라 미주 한인사회는 미국 본토의 안창호세력과 하와이 내의 이승만·박용만세력으로 삼분되어 미주한인들이 통일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후 갈릴리연합회는 1919년 국내 3·1운동 발발을 계기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는 박용만의 계획에 따라 같은 해 3월 30일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으로 변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