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우성(宇醒). 강원도 철원 출신이다.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듬해 네브라스카주(Nebraska州)에 있는 링컨고등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였다. 1906년 헤이스팅스대학에서 정치학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09년에 네브라스카의 커니농장(Kearney農場)에서 독립운동과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해 1912년 첫번 졸업생 13명을 배출하였다.
1911년 미주에서 설립된 재미동포의 단체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이 때 『국민개병설』·『군인수지』라는 책을 저술, 발간하였다.
1912년 하와이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관지인 『신한국보(新韓國報)』의 주필로 언론활동을 폈다. 1914년에는 농장을 임대하여 동포의 청년들이 공동으로 경작하게 하였다. 또 항일무장 독립운동단체인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을 조직해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130여 명을 독립전쟁에 대비한 인원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1915년 『아메리카혁명사』를 한글로 번역, 출판하였다. 1917년 상해(上海)의 신규식(申圭植)·조소앙(趙素昻) 등과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여 임시정부의 수립을 계획하였다. 또한 뉴욕에서 개최된 약소국동맹회(弱小國同盟會)에 참석하여 조국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국제정세 홍보를 목적으로 『태평양시사((太平洋時事)』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주필이 되었다. 1919년 3월 호놀룰루에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을 창단하고 『태평양시사』를 인수하여 기관지로 삼았다.
1919년 4월 서울에서 세칭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가 수립되었을 때 외무총장에 선출되었다. 그 해 9월 상해에서 각처의 임시정부를 통합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개편할 때도 역시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과 독립운동 방략에 있어 견해 차이가 컸기 때문에 부임하지 않았다. 5월 19일 하와이를 떠나 북경에 도착하여 신채호(申采浩)·신숙(申肅) 등 이승만의 독립노선에 반대하는 인사들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결성하였다.
국제 외교활동에 중점을 두고 있는 이승만의 독립운동 방안과는 달리, 이들은 독립군을 통합하여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해야한다는 입장이었다.
1923년 중국 상해에서 국민대표대회(國民代表大會)가 개최되자 임시정부 불신임운동에 앞장섰다. 1925년 7월 호놀룰루에서 태평양연안 국제신문기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북경에 대본공사를 설립하였다. 대본공사의 설립 목적은 중국에서 미개간지를 구입, 개간하여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고 독립군 양성자금을 마련하는 데 있었다.
1927년 4월, 호놀룰루 팔라마 지방에 국어학교를 설립하였다. 학교 이름을 우성학교(宇醒學校)라 하였고 직접 초등국어교과서를 편찬하여 교재로 사용하였다.
1928년 북경에서 대본공사 사업을 추진하던 중 10월 17일 이해명의 권총 저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