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는 회명을 간민자치회(墾民自治會)라 하였으나 중국 당국이 ‘자치’라는 말을 삭제하도록 요구함으로써 간민회라 하였다.
1913년 1월 26일 이동춘(李同春), 김립(金立) 등 25인 발기인은 150여 명이 집회한 가운데 간민회설립협의회를 개최하였다. 4월 26일백옥보(白玉甫)가 간민회총회 임시회장으로 선출되어 간민회 성립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회장에 김약연(金躍淵), 부회장에 백옥보가 선임되었다. 또 민적과(民籍課), 교육과, 법률과, 재무과, 식산흥업과(殖産興業課) 등등 9개 부서 임원을 임명하였다.
이후 연길·화룡·왕청 등 3개 현에 분회를 세웠고 분회 아래 많은 지회를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교민에 관한 모든 사항들을 자치적으로 해결하여 중국 관헌도 한인문제는 간민회와 협의하였다. 또한, 교민에게 애국심을 고취하여 독립운동의 기반조성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북간도지방은 후일 항일무장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북간도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그 이후에는 간도대한국민회로 개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