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8월 미국 상ㆍ하원 의원과 그 가족으로 구성된 동양관광단(123명) 가운데 28명이 극동 시찰을 목적으로 필리핀·홍콩·중국본토·만주를 거쳐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소식을 접한 민족 지도자들은 일본의 한국 통치 부당성과 야만성을 폭로하고 한국 국민의 독립 정신을 온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해 8월 7일 의원단이 상해에 도착하였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 안창호(安昌浩)·여운형(呂運亨) 등은 그들이 투숙한 호텔을 방문하여 우리 민족이 일본으로부터 압박 받는 상황과 한국 독립의 당연성을 알리고 독립운동을 후원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만주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고 있던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은 미의원단 일행이 만주를 거쳐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기회로 독립운동 상황을 이들에게 알릴 목적으로 여러 가지 투쟁 방법을 연구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광복군 총영의 영장(營長) 오동진(吳東振)은 미의원단이 통과하는 지역의 일본 식민 통치기관을 폭파함으로써 그들에게 한국인의 독립운동 전개 양상을 알리고자 하였다. 먼저 오동진은 소속 독립군 가운데 소속 독립군 가운데 정예 대원 13명을 선발하여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김영철(金榮哲)·김최명(金最明)·김성택(金聖澤)을 제1지대, 문일민(文一民|文逸民)·우덕선(禹德善)·안경신(安敬信)·장덕진(張德震)·박태열(朴泰烈)을 제2지대, 임용일(林龍日)·이학필(李學弼)·김응식(金應植)·이진무(李振武)·정인복(鄭仁福)을 제3지대로 조직하였다. 제1지대는 서울, 제2지대는 평양, 제3지대는 선천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제3지대는 분대하여 임용일·이학필·김응식은 선천, 이진무·정인복은 신의주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신의주로 파견된 대원은 신의주역을, 평양으로 파견된 대원은 평안남도청 안에 있는 경찰부를, 그리고 선천으로 파견된 대원은 선천경찰서를 각각 폭파시켰으나, 서울로 파견된 대원은 거사 전날 일본 경찰에 붙잡힘으로써 실패하였다.
평양 거사는 의용단 평양지단 단원도 동참하였다. 평양지단 단원 여행열, 표영준이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으나 김예진과 김효록이 평남도청에 던진 폭탄은 청사 일부를 파괴했다.
신의주역에 폭탄을 던진 정인복 등 대원은 역 건물의 일부분만 파괴시킨 데 불만을 느끼고 더 큰 거사를 하기로 결심하고 겸이포로 향하였다. 일본의 군수산업을 위해 일본 대재벌 미쓰비시가 건설한 대규모의 제철소를 폭파하기 위해서였다.
거사를 성공시킨 정인복은 용천에 피신해 있다가 경찰에 잡혔으나 용암포(龍巖浦)로 납송 중 자동차에서 경찰을 때려 떨어뜨리고 탈출에 성공, 무사히 만주의 본부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일본의 통치기관을 파괴하고 친일파를 숙청하는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22년 3월 만주 안동현 삼도구(三道溝)에서 활동 중 일본 경찰의 밀정인 김윤옥(金允玉)에 의해 정체가 탄로 나자 일본 경찰 30여 명에게 포위되어 끝까지 교전하다가 동지들과 같이 전사하였다.